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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0 컬쳐

<나쁜말 양파>

2023.11.04

ⓒ <나쁜말 양파> 플레이 화면

온라인 세상에서 밈 모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발육 상태가 다른 양파 두 개가 물컵에 담긴 채 나란히 놓인 사진 한 장을 기억할 것이다. 양파에게 각각 긍정적인(착한) 말을 하면 쑥쑥 크고, 부정적인(나쁜) 말을 하면 성장이 더딜 것이라는 추측과 달리 결과는 정반대였던 이 사진은, 계획에서 빗나간 결과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틱톡과 유튜브에도 ‘칭찬 양파’와 ‘비난 양파’를 키우는 방법을 담은 숏폼 콘텐츠가 다수 있다. 물론 이 실험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 두 양파가 아주 가까이 붙어 있어 각각 착한 말과 나쁜 말을 구분해 들려주는 의미가 없다고 구체적으로 반박당하거나 유사 과학이라고 간단하게 비난받는다.

하지만 과학적 해석의 여지가 없는 현상이라고 해서 행위의 목적이나 태도까지 설명할 필요가 없는 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이 실험의 의도가 말과 대화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있다고 이해할 것이다. 비록 그 대상이 양파일지라도 말이다. 잊을 만하면 착한말 양파와 나쁜말 양파를 다룬 숏폼 콘텐츠가 등장해 심각하지 않은 유머로 소비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스마트폰 게임 <나쁜말 양파>는 양파에 대한 이러한 공동의 기억을 모티프로 한다.

양파와 AI의 만남
<나쁜말 양파>의 첫 단계는 갓 태어난(?) 아기 양파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물을 주면서 키워야 한다. 유저가 양파에게 건네는 말이 물 역할을 한다. 스마트 기기에 내장된 마이크로 양파에게 말을 건네면 양파는 유저에게 대답한다. 이때 양파의 대답은 챗GPT를 기반으로 생성된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예상할 수 있지만 확실히는 알 수 없다.

막상 양파를 말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당황스럽다. “안녕.” “오늘 날씨가 좋다.” 이런 가벼운 인사말로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다 보니, 내가 하는 대화가 나쁜 말과 좋은 말 중 어느 쪽에 가까운지 알 수 있었다. 발음이 불명확한 질문은 제외하고, 양파들은 별 영양가 없는 내 말에 대체로 성의 있게 대답해줬다. 처음에는 “어디에 살아?” 같은 호구조사식 질문을 하다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했더니 <소드 아트 온라인>을 추천하는 양파. AI의 답변치고는 취향이 살아 있다.

앱스토어 후기에도 양파의 친절한 답변에 감동한 유저가 많다. 나이를 밝힌 유저가 대체로 초등학교 저학년이란 점도 재미있다. (물론 온라인이니 실제 나이를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일단 믿어보자.) “공부하다가 지치면 얘가 위로해줘요. 너무 고맙고 귀여워요.” “평소에 욕을 많이 한다면 이 게임을 추천합니다.” “고민을 잘 풀 수 있는 좋은 상담 게임.” 유저는 ‘식물도감’을 통해 내가 키운 양파를 모아 볼 수 있는데, 엔딩의 양이 꽤 많다. 초코 양파, 어쩔 양파, 죽된 양파, AI 양파, 어린이 양파…. 공략법을 찾아봤는데, 이 역시 틱톡으로 정리되어 있다.

첵스 파맛이 당선되었듯
게임을 하면서 농심켈로그사의 시리얼 ‘첵스’의 마케팅이 떠올랐다. 지난 2004년, 농심켈로그는 첵스의 마스코트 홍보를 위해 선거 이벤트를 열었다. 초콜릿색 ‘체키’와 푸릇한 대파를 연상시키는 초록빛 후보 ‘차카’의 양강 구도였던 이 선거에서 당선된 건 차카였다. 회사의 의도는 달콤한 초콜릿맛 ‘체키’의 당선이었겠지만, 결과는 반대였던 것이다. 이 밈은 지난 2020년 첵스 파맛이 한정판으로 출시되면서 비로소 완성됐다.

의도와 다른 결과가 도출된 두 사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본다. 달콤한 시리얼의 적수로 이미지 메이킹을 했지만 결국 당선되어버린 (득표의 대부분이 매크로를 통한 부정한 것이라 농심켈로그에 의해 당선무효 판정을 받았지만, 어쨌든) 첵스 파맛과 악담 혹은 쌍욕을 퍼부은 나쁜말 양파가 더 잘 크는 역설을 보고 자란 우리. 2000년대 초반에서 시간은 흘러, 첵스 파맛을 먹어본 유튜버들의 후기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고, 양파도 손쉽게(?) 키울 수 있게 된 것이 신기하다.

칭찬을 듬뿍 받은 양파가 더 잘 자란다는 속설은 굳이 증명하거나 반박하지 않아도 되는 성질을 가진다. 그리고 게임이 아닌 실물 양파를 대상으로 할 때, 내 맘대로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이런 점에서 게임 <나쁜말 양파>는 의도대로 양파를 키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최소한 챗GPT가 어떻게 반응할지 추측은 할 수 있다. 어느 게임 리뷰에 따르면, 양파에 지극정성 친절하게 말을 건네자 ‘대천사 양파’가 되었다고 한다. “사랑으로 키워주신 주인님, 언젠가 꼭 보답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나쁜말 양파’ 밈에서 파생된 또 다른 밈중 하나다. 이렇게 밈의 데이터베이스는 계속 축적될 것이다.


글. 황소연 | 사진. <나쁜말 양파> 플레이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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