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혼자 쓰지 않는 시를 위하여 (1)'에서 이어집니다.
ⓒ 제주 강정마을에서 평화 해상 활동을 위한 ‘요나스 웨일’ 타기
사실 나는 함께 철학 공부를 한 적이 있던 한 목사님이 생각나 도와달라고 연락드린 적이 있다. 나는 살고 싶었던 것 같다. 할딱이는 밭은 숨을 겨우 쉬면서,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 계속해서 도움을 구했다. 내 주변엔 의외였다 싶을 만큼 기꺼이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게 아닌 함께 살기 위해, 생명을 구하고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기꺼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그렇게 해서 한동안, 온라인 회의를 통해 제주도에 있던 활동가들과 연결되어 예배에 참석했다.
삶의 공간이 서울과는 현저하게 다른 지정학적 정체성이 있는 그곳에 모여 평화 운동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이들이 나눠주는 생각들을 듣는 게 참 좋았다. 멀리 떨어져 있었고, 살을 맞대본 적 없었지만, 나는 그곳으로부터 전해져오는 슬픔과 생기, 그리고 평화를 추구하는 삶에서 오는 단단한 다정함으로부터 용기를 많이 얻었다. 이 세계의 관습과 사회에 만연한 폭력을 의심하고 거부하는 그들의 삶은 일반적인 시선에서라면 어리석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모두를 공존하게 하는 안전한 사회를 염원하고 실제로 그런 기반을 꾸리려는 움직임이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들어 있었다.
진심으로 나는 그것을 보았다.
나는 살기 위해 시를 쓴다. 직업으로서 밥벌이를 위해 시를 쓴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함께’ 잘 살기 위해 쓴다. 피로함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한 기도와 환대를 나누는 이들을 나는 시로 증언하게 된 것 같다. 고통을 잊지 않으려고. 고통을 알아채려고. 공존하기 위해서. 나는 이미 시 그 자체인 그들을 보았다. 어렵더라도 놓아버리지 않을 생각이다. 어떻게든 누군가를 구하려는 애타는 마음이 삶에 가득한 이들의 그 절박함을 믿으니까. 그 믿음으로 연결은 또다시 새로워지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다. 내게 구체적인 빛이 되어주었던 짧은 시 한 편을 소개하며 마친다. 우리는 먼 곳일지라도, 심지어 모르는 누군가에게일지라도 조명을 비춰줄 수 있다. 혹 자신이 죽어 있는 상태와 같을지라도 빛을 비추는 게 가능하다. 뜻하지 않은 그 빛이 누군가에게 구명조끼가 될 수도 있다. 그걸 믿게 해준 시다.
플래시를 비춰
죽은 너에게 그림자를 지어준다
심심하면 발끝을 틀었다
너는 나의 오후가 되었다 새벽이 되었다
‐ 희음, <라이프> 전문
소개
윤은성
거리와 동료, 시(詩), 그리고 수라 갯벌의 친구. 시집 <주소를 쥐고>를 펴냈으며, 기후 활동과 문학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글 | 사진. 윤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