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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1 에세이

제36회 도쿄국제영화제에 가다 (2)

2023.11.26

이 글은 '제36회 도쿄국제영화제에 가다 (1)'에서 이어집니다.

ⓒ 켈리 라이카트, 구로사와 기요시, 지아장커 감독이 참여한 ‘오즈 야스지로 감독 탄생 120주년 기념 토크: Shoulders of Giants’

영화제라는 독특한 장소
‘오즈 야스지로 감독 탄생 120주년 기념 토크: Shoulders of Giants’에서 켈리 라이카트, 구로사와 기요시, 지아장커 감독이 오즈 야즈시로의 작품에 관해 논하는 모습은 무척 신선했다. 이를테면 각자 인상 깊게 본 영화를 바탕으로 오즈 감독론을 길게 피력한 셈인데 ‘저들이 오즈 야스지로를 덕질하는 모습을 다 보는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시간제한이 없었다면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졌을 것이다.

행사가 끝나니 오랜만에 오즈 감독의 영화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제와 맞물려 ‘오즈 야스지로 감독 주간’을 진행 중인 일본 국립영화아카이브로 향했다. 일본의 영상자료원 격인데 행사 기간이라 그런지 다양한 국가와 나이대의 관객이 이곳을 채우고 있었다. 이날 상영한 영화는 <부초 이야기>(1934)였다. 한 유랑 극단 단장이 옛 연인과 자신의 아들이 사는 도시를 방문하는데 결국 이들의 관계가 밝혀지며 사건이 발생한다. <부초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치정극이 바탕이 되는 서사다. 그럼에도 간결하게 완성된 이미지들이 더없이 아름답다. 일일이 손으로 썼을 크레디트와 대사, 살짝 번진 듯한 흑백 스크린 속 요소들, 빛이 반사돼 드러난 관객의 실루엣. 현장에는 그랜드피아노가 놓여 있었고 장면의 흐름에 맞춰 배경음악을 연주했는데, 그 상황이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과거의 언젠가로 돌아가 극장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월드 프리미어로 수백 편의 신작이 쏟아지는 행사에서 결국 가장 마음이 동하는 건 흑백영화인가. 자조 섞인 생각이 들면서도 벅차오른 감정에 극장을 나와 오래도록 걸었다.

ⓒ 일본 국립영화아카이브

개인적으로 몹시 지쳐 있던 시기였다.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 굴러가는 주간지 기자의 삶은 정신없이 바쁘면서도 권태롭고 지겨웠다. 올해부터 타 팀 업무까지 나눠 맡느라 체력적으로도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여러모로 이 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에 다다를 때마다 ‘퇴사해야겠다’는 말을 속으로, 겉으로 자주 내뱉었다. 그럼에도 조금 더 해보자고 다짐하게 된 계기가 이번 출장이었다. 뒤늦게 취재 욕심이 났다고는 하나 애초에 떠넘겨진 짐처럼 받아 든 업무가 마냥 달가울 리 없었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그런데도 도쿄에서 취재하는 동안 즐거웠다. 아주 깊고 질척한 늪에 푹 잠겨 있다 빠져나온 느낌인데, 불쾌하기보다 오히려 충만해진 기분이 든다. 영화제 출장이 처음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특별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잘 모르겠다. 그저 주변을 돌아볼 때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좋았다. 데뷔작을 손에 든 신예가 떨리는 마음으로 관객 앞에 서 있는데, 그 옆에선 100년 전 만들어진 거장의 작품을 디지털로 복원해 상영한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동시대 감독이 있는가 하면 다른 문화권의 연출자들이 모여 그의 세계에 관해 논한다. 기자들은 매일같이 길게 줄을 선 채로 전날 상영한 영화, 당일 오전에 진행한 심포지엄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영화를 보고 그에 관해 말하며 앞으로 만들어질 또 다른 작품의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일. 시공간의 경계가 부드럽게 무너진, 영화제라는 장소만이 실현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내내 침체됐다고 여기던 영화가 태동하고 있었다.

그때의 설렘을 잊지 않으려 이 글을 쓴다.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이 얼마나 지속될지, 기자 일을 얼마나 더 할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렇지만 일과 관계없이 도쿄영화제에서 느낀 것과 같은 감정이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님은 안다. 그만큼 기꺼운 순간을 좀 더 자주 마주하고 싶다. 그런 바람으로, 오늘도 영화를 본다.


글 | 사진. 조현나(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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