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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2 에세이

<레슨 인 케미스트리> (2)

2023.12.07

이 글은 '<레슨 인 케미스트리> (1)'에서 이어집니다.

드라마 <레슨 인 케미스트리> 스틸 ©애플TV

드라마라는 좋은 인생 수업
여러 비극적인 플롯 요소가 있음에도 소설이 코믹한 분위기가 강하다면, 드라마는 여성 임파워먼트에 좀 더 초점을 주었다. 이 중심 변화는 그 자체로 약점이지는 않지만, 소설에 비하면 드라마는 여러 다른 작품이 생각날 정도로 전형적으로 보이는 특징이 있다. 소설에서 엘리자베스는 아스퍼거 증후군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남다른 감정 표현을 가진 개성적 인물로 조형되었다면, 드라마에서는 그래도 공감 능력이 있는 엘리자베스가 주변 인물과 맺는 감정적 관계들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독자적 개성은 줄어도 드라마는 확고한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소설에서는 평범한 주부였던 이웃 해리엇 슬로언(아자 나오미 킹)이 흑인 인권과 지역 주거권을 지키는 변호사로 각색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엘리자베스 지도교수의 폭력이나 동성애자였던 오빠에게 행해진 박해는 경고문을 달고 더욱 분명하게 묘사되었다. 소설의 다채로운 면을 하나의 방향으로 갈아 강하게 벼린 드라마의 각색이 아쉬울 수는 있지만, 제작 프로듀서로도 참여하고 있는 브리 라슨과 그 팀의 사회 변화적 의지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만큼 브리 라슨도 깊이 있는 연기로 자신만의 엘리자베스 조트를 만들었다.

<레슨 인 케미스트리> 드라마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소설과 다른 점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소설과 같은 부분, 소설에 있던 본연적 약점 때문이다. 미술은 <스텝포드 와이프>의 세계처럼 매끈하고, 엘리자베스의 헤어도 의상도 당시의 백화점 광고에서 빠져나온 듯 세팅되었다. 또한 지적인 화학자이자 유능한 요리인, 뛰어난 방송인인 엘리자베스는 당시의 남성주의적 세계에서 저항하는 투사이지만, 한편으로는 사회가 여성에게 바라는 이상적 매력을 갖췄다. 엘리자베스의 딸 매드도 나이에 비해 영리한 아이로서 사랑스럽고, 소설과 드라마의 결말이 일치한다면 종국에는 이 가족을 기다리는 행운이 있다. 멜로드라마적 구성에 따라 남달리 뛰어난 특성과 덕성을 가진 주인공이 처음에는 박해받지만 결국은 그 미덕에 따른 보상을 얻는 과정이다. 허구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보니 가머스의 소설은 순진한 판타지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었다. 50년대에 과학자인 여성이 요리 쇼로 성공한다는 무용담은 그 자체로 읽기에 즐겁고 의미도 있지만, 역사적 현실성은 줄어들었다. 드라마로 각색되며 엘리자베스는 현실적 여성의 면모를 띠었기에 방송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과정이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소설과 차별화하기 위한 각색이 소설의 플롯을 따라가며 생기는 위화감이 있다.

같은 요리 쇼 진행자로서 실존 인물이었던 줄리아 차일드를 주인공으로 다룬 HBO맥스의 <줄리아>에서는 요리하는 여성의 딜레마를 적극적으로 지적한다. 쇼의 성공으로 유명인사가 된 줄리아가 상을 받으러 뉴욕에 갔다가 여성주의 이론가 베티 프리단을 만나는 장면이다. 베티 프리단은 당신의 쇼가 여성을 해방한 게 아니라 요리까지도 근사하게 해야 하는 짐까지 지웠다는 지적을 한다. 이에 줄리아는 충격받고 자신의 일을 돌아본다. <레슨 인 케미스트리> 속 엘리자베스 조트가 실존했다면 베티 프리단에게 대답할 만한 논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레슨 인 케미스트리>에는 이런 판타지만이 갖는 희열이 있다. 6화, 요리 쇼를 진행하는 엘리자베스는 요리의 과학적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방청객에게 질문을 받고, 의대에 진학해보라고 권한다. 평범한 주부로서의 삶밖에 몰랐던 방청객 필리스의 삶은 요리 쇼 하나로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 장면을 본 수많은 여자들은 어떤 용기를 얻었을까. 허구의 역사극인 <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대체역사적 낙천주의가 있는 만큼, 우리에게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라고 격려해준다. 현실에선 아무리 어렵더라도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책을 읽고, 드라마를 보고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좋은 ‘수업’이 되었으리라.

소개

박현주
작가, 드라마 칼럼니스트.


글.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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