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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4 컬쳐

탐식(探食)을 추구하는 향유자를 위한 안내서

2024.01.08

옥매실 진 데이지

얼마 전 ‘술은 시작하지 않을 수 있으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을 들었다. 어찌나 공감되던지. 하지만, 어쩌겠어. 아무리 백해무익이라 한들 이미 숱한 세월을 함께했고 이제 와 모르고 살기에는 아쉬운 탐험의 장인 것을. 술에 빠져 있되, 술에 빠져 살지는 말자는 마음가짐으로 이 끝없이 멋진 화학적 세계를 조심스레 누비고 있다. 어떤 탐험이든 위험은 따르는 법이니까.

어쩌면 시작도 하지 않는 게 맞을 이 매력적이고도 위험한 세계를, 그럼에도 기어이 탐식적 호기심에 이끌려 탐험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안내하고 싶은 곳이 있다면, 전주에 있는 바 ‘차가운 새벽’이다.

술을 처음 접할 때 칵테일만큼 흥미롭게 접하기 좋은 장르도 드물다는 생각이다. 사람은 익숙함 속 새로움에 마음이 끌리기 마련이기에 곧잘 즐기던 음료 취향에 맞춰 그와 비슷한 칵테일로 시작해보면, 아는 듯 전혀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놓인다. 거기에서 더 알아가고 싶다면 나아가고, 아닌 것 같으면 멈추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차가운 새벽’은 술, 그리고 칵테일이라는 장르를 처음 접하는 사람부터 이미 먼 길을 온 사람까지 모두를 위한 최적의 장소다. 차가운 새벽에는 술 메뉴판이 없다. 선호하는 맛과 스타일을 말하면 그에 맞춰 칵테일을 내어준다. ‘이런 맛과 이런 맛의 술은 어떨까.’ 막연히 생각하던 것을 실제로 만나볼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물론 나처럼 ‘새로운 경험을 접하기’가 취향인 사람 또한 즐겁고도 세심한 상담을 통해 얼마든지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최근에는 블러디 메리의 마라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블러디 등소평’을 마셨는데 토마토 주스와 포르치니 버섯이 들어간 보드카의 깊고 짜릿한 감칠맛, 화자오의 얼얼한 맛 등등이 더해져 ‘훠궈를 토마토탕에 먹던 중 홍탕이 침범한 맛’이란 마스터의 표현이 너무나 적절히 어울리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바, 차가운 새벽 가게 내부 사진

다만 초행자가 아닌, 이미 어느 정도 먼 길을 왔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정립된 취향의 틀에서 잠시 벗어나보기를 권한다. 물론 차가운 새벽에서도 늘 마시던 칵테일을 마실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 칵테일, 술에 관심을 갖고 좋아하게 된 계기를 떠올려본다면 늘 알던 맛이라서가 아닐 것이다. 이 위험할 것 같던 세상에 ‘이런 맛’이 존재한다는 걸 발견한 순간이 있었기에 여러 바를 가보고, 다양한 술을 접했을 것이다. ‘이런 맛’을 또다시 경험하기 위해. 차가운 새벽은 바로 그 ‘이런 맛’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열린 마음을 갖는다면 그간 알게 모르게 갖고 있던 매너리즘을 사뿐히 내려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조금 더 달콤하게 술을 접해보고 싶다면 6도 정도 도수의 리큐르가 들어간 ‘어른의 아이스크림’과 ‘소르베, 샤베트 칵테일’ 그리고 ‘술푸–딩’이 있다. 차가운 새벽에 가면 꼭 먹는 메뉴인데, 특히나 술푸–딩은 외부 평균 기온이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시기에만 만들기 때문에 겨울 즈음에 전주 여행을 계획하게 되는 계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BCN토닉, 핑크페퍼 / 어른의 아이스크림

취향을 넓혀가는 즐거움
어른의 아이스크림은 달걀, 우유, 생크림, 바닐라를 사용해 커스터드를 만든 다음 저온 살균해서 술을 넣는다. 그래서 술이 날아가지 않고, 배치 프리저(젤라토를 만드는 기계)를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오버런(공기의 함량)이 잘 되어 부드러운 질감이 특징인데 각각의 맛별로 잘 어울리는 리큐르를 취향껏 끼얹어 먹는다. 소르베, 샤베트 칵테일은 계절에 따라 제철 과일, 재료를 사용해 주기적으로 바뀌고 술푸-딩도 고정 메뉴와 함께 그때마다 종류가 조금씩 달라진다. 어떤 메뉴든 좋지만, 개인적 취향으로 ‘딸기×장미×리치×마스카포네’ 샤베트를 무척 맛있게 먹었다. 장미향이 은은한듯 뚜렷하고, 약간의 산미가 있는 딸기 콩포트와 리치, 마스카포네 아이스크림의 조화가 인상적이다. 재료의 특성과 유성분의 비율에 따라 같은 샤베트나 소르베라도 질감의 차이가 확연하기에 이 부분을 비교해 먹어보는 것도 즐거운 탐색 포인트가 된다. 술푸–딩은 아직까지는 캐러멜 커스터드×바닐라 스파이스드 럼이 취향이다. 가장 클래식한 맛이라 볼 수도 있지만 푸딩 바닥에 깔리는 캐러멜마저도 타기 직전의 온도인 172도까지 아슬아슬하게 캐러멜화한 설탕을 굳혀서 부순 것과 160도 캐러멜이 섞여 깔려 있다.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디테일이 남다른 데다 스파이시한 럼이 더해져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커스터드 푸딩보다 맛이 다채롭고, 깊이감이 있다.

술푸–딩 / 딸기×장미×리치×마스카포네 샤베트

또한 공간을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차가운 새벽이 있는 전주 남부시장 2층 청년몰 자체를 좋아한다. 각자 뚜렷한 개성을 가진 가게들이 ‘동물의 숲’ 마을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평화롭고 차분하게 반짝이는 곳. 이곳에 6년째 자리하고 있는 차가운 새벽은 들어서는 순간 새벽의 찬 공기를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조용하면서도 면밀하고 찬찬히 흘러가는 공간 속에 있다 보면 새벽에 잠시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며 사유하는 시간에 놓인 듯하다. 내게는 무척이나 각별하고, 일상 속에서 드문드문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다.

전주는 가면 갈수록 매력 있고 정이 가는 도시다. 같은 지역을 다시 가더라도 갔던 곳을 또 가는 경우가 많지는 않은데 전주는 갔던 곳 때문에 다시 가고 있다. 그중 하나가 차가운 새벽이기도 하고. 차가운 새벽이 집 근처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가도 곧장 생각을 고쳐먹는다. 차가운 새벽이 전주에 있기에 전주에 갈 핑계도 있는 것이라고.

기호를 든든한 저변에 두고 취향의 영역을 넓혀가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칵테일, 아이스크림, 소르베와 샤베트 칵테일 그리고 술푸–딩. 어떤 것에든 관심이 있거나 이미 좋아하고 있는 이라면, 그 무진한 향유 속 의미 있는 진전을 위해 이처럼 안내하는 바이다.

바, 차가운 새벽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2길 53
남부시장 6동 2층 청년몰
월~목 15:00~23:00
금~토 15:00~01:00 (일 휴무)
트위터 @BarColdDawn

소개

김여행
먼 타지로 떠나는 여행이든, 동네 카페 투어든, 항상 어딘가로 떠날 궁리를 하는 가장 보통의 직장인. 엑스 계정 @_travelkim


글 | 사진. 김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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