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 커버스토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글. 김윤지
1989년 미국 뉴멕시코주. 체육관 매니저로 일하며 무기력하게 일상을 보내던 루(크리스틴 스튜어트) 앞에 자유로운 영혼 잭키(케이티 오브라이언)가 나타난다.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리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보디빌딩 대회 결승전에 참가하기 위해 이 마을을 찾은 외지인 잭키가 루의 집에 머무르게 되면서 짧은 시간 안에 서로에게 깊이 빠져드는 둘. 언뜻 평범한 퀴어 로맨스로 보이는 이야기는 범죄에 깊이 연루된 루의 가족과 잭키가 엮이기 시작하면서 누아르와 범죄 스릴러를 넘나든다. 루를 위해 상상 초월 살인을 저지르는 잭키와 잭키를 위해 시체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는 루. 위기의 순간, 두 여자의 피를 끓게 만든 건 사랑일까 욕망일까.

일상의 파괴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연기한 루는 1980년대의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랐으며, 오픈리 퀴어이자 아웃사이더이다. 제 손으로 서툴게 자른 머리에 멋대로 잘라낸 티셔츠 차림의 루는 틀에 갇힌 스타일을 가진 마을 여자들 사이에서 분명 튀는 존재다. 그런 루에게는 종종 자신이 살고 있는 이 마을이 한없이 작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를 드러내듯 루의 체육관 벽에 붙은 문구들은 그녀의 ‘아메리칸드림’을 향한 열망을 말해준다.
하지만, 동시에 루는 시대에 갇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총기 관련 일을 하며 무기 밀매, 살인과 같은 온갖 범죄를 저질러 온 아버지 랭스턴(에드 해리스) 밑에서 억눌린 채 살아왔고 오랫동안 가정 폭력을 겪어온 언니 베스(지나 말론)의 곁을 지키려 평생 마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다. 라스베이거스로 함께 떠날 것을 권하는 잭키에게도 베스의 걱정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다.
그렇기에 잭키로 인한 루의 변화는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무감한 표정으로 체육관의 막힌 변기나 뚫던 루는 잭키와 가까워지며 살아 있음을 느낀다. 항상 다른 사람이 어지른 것을 치우며 살아왔지만, 사실 루는 언제든 어떤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점차 드러난다. 루가 처음 체육관에 들어선 잭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던 건 그녀의 육체성 때문만이 아니다. 외지인임에도 금방 어디든 녹아드는, 무기력한 자신과는 다르게 진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잭키의 개방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 오랜 시간 억눌려 있던 루에게는 생기로 다가왔다. 잭키와 사랑에 빠지면서 매일 똑같은 일상에서 벗어난 루는 잭키를 지키고자 가족의 그늘에서 벗어나며 자신들을 둘러싼 폭력에 맞서는 주도적인 인물로 변화해나간다.

강한 여성의 욕망과 사랑
잘 알려지지 않은 1980년대 보디빌딩의 세계를 배경으로 삼은 영화는 통념 속의 ‘강한 여성’ 캐릭터 잭키를 보란 듯 등장시킨다. 보디빌딩 대회 우승이라는 뚜렷한 야망을 가지고 있는 잭키는 사회에서 비주류이지만 상승의 야망을 가진 사람을 대변하기도 한다. 유망한 여성 보디빌더 잭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 주저함이 없다.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길목에 잠시 들른 마을.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일자리와 머무를 곳이 필요한 잭키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다소 무모하고 위험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강한 여성이 만드는 강한 여성에 대한 영화가 필요한 시대이지 않냐는 사람들과의 피상적인 대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로즈 글래스 감독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강인함을 지닌 여성이 주변 사람들에 의해 그 강인함을 이용당하고 조종당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자신보다 덩치 큰 남자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주먹을 날리던 잭키지만, 큰 덩치도, 굴곡진 근육도 마을을 손안에 넣고 쥐락펴락하는 랭스턴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보디빌딩 우승이라는 욕망에 대한 집착이 정점에 달한 뒤, 필연적으로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가 된 잭키는 랭스턴에게 정신적으로 조종당하고야 만다. 감독은 이렇듯 잭키를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이 ‘강한 여자’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되묻는다.
사실 영화를 잘 들여다보면, 강한 여성인 잭키를 진정으로 변화시킨 건 스테로이드 약물도 성공에 대한 욕망도 아니다. 고통스러워하는 루를 보며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낀 잭키는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한순간에 헐크로 변해 루를 괴롭게 하는 요소를 제거해버린다. 그녀의 본능과도 같은 파괴성을 끌어낸 건 그 무엇도 아닌 사랑일지도 모른다.

괴짜 커플의 지저분한 승리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나 〈델마와 루이스〉 등의 영화에서 범죄자 커플은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해왔다. 하지만 루와 잭키 같은 괴짜 커플은 이제껏 없었다. 쿨한 외면으로 억눌린 과거를 숨기는 루와 순진무구해 보이지만 언제고 무서운 킬러로 변신할 본능을 가진 잭키. 서로를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는 둘은 나쁘고 극단적인 행동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미친 사랑을 보여준다. 사랑으로 시작된 이 복수의 여정이 결코 옳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비정상적인 둘의 관계가 완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잭키가 루의 외로움을 뒤흔들어 그녀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통쾌한 여성들의 복수를 원하는 이들에겐 이 영화가 어둡게 다가올 수 있다. 가족으로부터 잭키와 자신을 지키는 과정에서 피해자였던 루는 순식간에 가해자가 되며, 불필요한 범죄에 가담하게 되고 그토록 증오하던 랭스턴과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며 일은 점점 위태롭게 꼬여만 간다.
결국 잭키의 근육이 FBI도 못 잡는 사이코 랭스턴에겐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하면서 종국엔 공상으로 도피해버리는데, 이는 여성이 이기는 방식을 전면적으로 거스른다. 순식간에 가해자가 되어 끝내 지저분하게 승리를 거머쥐는 루와 잭키의 이야기가 보기 편하지만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질주하는 두 사람의 질주는 폭발적인 감정의 흔들림을 선사할 것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