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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25 에세이

2030의 오늘은 - 안녕, 돈키호테

2024.07.26

글. 추병진

책방지기에게는 돈키호테처럼 무모한 면이 있었다.

다만 소설 속 돈키호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손님의 욕구를 파악하는 섬세함과

책 판매를 소홀히 하지 않는 현실감각이 아니었을까.

그 덕분에 책방은 7년을 버텼다.

하지만 돈키호테의 모험에는 끝이 있다.

책방지기는 스스로 모험의 끝을 정했다.

한동안 발길이 뜸했던 책방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현재 보유하신 적립금은 신간 구매 시 10% 할인과 병행하여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 8월 영업 종료 예정.” 이 책방을 처음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4년 전, 정든 동네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이사를 준비하던 때였다. 익숙해진 동네와 작별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울적해져 동네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정처 없이 어두운 골목을 헤매다가 ‘○○책방’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마트와 음식점밖에 안 보이는 주택가에 난데없는 책방? 가까이 가보니 유리창 너머로 서가에 꽂힌 책들이 보였다. 놀랍게도 그중에 시험 교재나 문제집은 없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영락없는 ‘동네 책방’이었다. 유레카! 망설이지 않고 책방 문을 열었다.

책방은 고요했다. 문밖 행인들의 목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내 발걸음 소리만 간혹 들렸다. 천천히 서가를 둘러보며 고요한 책방 분위기에 스며들었다. 음, 이제 무슨 책을 골라야 하나. 책방지기가 엄선해서 들여놓았을 책을 한참 훑어보고 펼쳐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구석에 있던 책방지기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이 책 괜찮은데 한번 읽어보실래요?”

“아, 어떤 책이에요?”

“젊은 시인이 쓴 첫 시집인데,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독특한 매력이 있어요. 요즘 손님들한테 많이 추천하는 책이에요.”

책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페이지를 넘겨보니 책방지기 말대로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자기만의 문체로 쓴 시들이 눈에 띄었다. 책 보는 안목이 있으시구나. 책값을 계산하면서 책방지기에게 궁금한 점을 몇 가지 물었다. 이 낯선 책방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책방은 3년 전에 열었어요. 저는 책이랑 관련 없는 일을 해왔는데, 직장생활 마무리하고 책방을 운영해보고 싶어서 시작했어요.” 한동네에 살면서 3년 동안 책방의 존재조차 몰랐다니. 아니 그보다도 은퇴 후 ‘핫플레이스’도 아닌 지역에, 그것도 문화시설 하나 없는 주택가에 책방을 차릴 생각을 하다니. “서점의 위기” “책 안 읽는 사회” 운운하는 시대에 책방지기를 자처한 그를 보니 돈키호테의 용맹함이 떠올랐다. 시대의 흐름마저 거스르는 모험 정신이랄까.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자,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책방을 나섰다. 집에서 나올 때와 달리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아, 이런 곳을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서럽게도 예정된 이삿날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책의 위로

이삿날이 오기 전까지 적어도 네댓 번은 책방에 들렀다. 그때마다 낯선 책방에 온 것처럼 서가의 왼쪽 위부터 오른쪽 아래까지 책방에 있는 모든 책을 훑었다. 구경이 끝나면 책방지기에게 말을 건넸다. 대화의 물꼬가 트이면 자연스레 내가 하는 일, 관심사, 시답잖은 생각들까지 스스럼없이 말하곤 했다. 그러다가 대화는 어김없이 책방지기의 책 추천으로 이어졌다. “그랬구나. 혹시 이 책 읽어보셨어요?”그는 기다렸다는 듯 서가에 있던 책을 건네주고 슬며시 본인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내가 책을 살펴보는 동안 말없이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는 독자와 책이 감응하는 시간을 묵묵히 기다려주곤 했다. 그의 조용한 영업(?) 덕분에 나는 매번 책을 한두 권씩 사 들고 나왔다. 안목 있는 책방지기의 추천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방 안에 책이 하나둘씩 쌓여가는 동안 이삿날이 다가왔다. 동네를 떠나기 전 책방에 들러 인사말을 전했다. 나의 이사를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책방지기의 얼굴에 아쉬움이 비쳤다. “자주는 못 오겠지만, 종종 뵙겠다.”라는 말을 전하고 책방에서 나왔다. 골수 단골이 될 뻔했던 나는 그렇게 책방과 멀어졌다.

“8월 영업 종료 예정”이라는 문장 앞에서 한동안 잊고 지낸 기억을 떠올렸다. 돌이켜보면 나는 사람 대신 책으로 위로받고 싶을 때 책방에 찾아갔다. 내가 원한 건 기분을 낫게 해줄 만병통치약 같은 책이었다. 세상에 그런 책이 있겠냐마는, 책방지기는 내게 꼭 필요했던 책을 서가에서 찾아주었다. 〈묵묵〉, 〈시와 산책〉, 〈내 생의 중력에 맞서〉 같은 책들이 그러했다. 그는 내가 흘린 말 한마디, 사소한 동작으로부터 단서를 얻고 적당한 책을 골랐으리라. 책 처방은 제법 효과적이었다. 그가 건네준 책들은 이사를 앞두고 울적했던 마음을, 기나긴 통근 시간과 직장 생활의 피로를, 사회에서 차별받고 배제된 동료들에 대한 아픔을 위로해주었다.

책방지기에게는 돈키호테처럼 무모한 면이 있었다. 다만 소설 속 돈키호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손님의 욕구를 파악하는 섬세함과 책 판매를 소홀히 하지 않는 현실감각이 아니었을까. 그 덕분에 책방은 7년을 버텼다. 하지만 돈키호테의 모험에는 끝이 있다. 책방지기는 스스로 모험의 끝을 정했다. 책방이 사라지면 누가 내게 책을 추천해줄까. 책방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다시, 또다시 그곳에 가야겠다. 돈키호테의 모험이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사단법인 오늘은’에는 아트퍼스트 에세이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챙김을 하고 있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매주 글을 쓰고 나누며 얻은 정서적 위로를, 자기 이야기로 꾹꾹 눌러 담은 이 글을 통해 또 다른 대중과 나누고자 합니다.


추병진

영화와 책을 자양분 삼아 살아갑니다. 카메라를 들고 영상 기록 활동을 합니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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