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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28A 컬쳐

충청 동네 - 이번 영화제에 유감을 표합니다

2024.10.17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원 썸머 나잇' 두 번째 날

단차 없이 놓인 접이식 간이의자, 해상도 낮은 자그마한 빔 프로젝터 스크린, 두리번두리번 여기가 맞나 싶은 표정을 지으며 어정쩡하게 착석하는 관람객들. 누군가의 팔순 잔치가 열릴 것 같은 컨벤션홀 안에서 나의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첫 번째 영화를 기다린다. 여기가… 맞… 맞나?


글. 김선미 | 사진. 양경필‧제천국제음악영화제

영화 〈하와이 연가〉를 상영한 청풍리조트 컨벤션홀

취향과 생각의 폭을 넓히는 통로, 영화제

영화학도도, 영화업계 종사자도 아니지만 틈만 나면 이런저런 영화제를 찾아다녔다. 1997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찾아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부터 최근 관람한 서울국제영화제와 서울국제건축영화제까지. 전 세계의 창작자들이 펼쳐놓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영화들은 내 취향과 생각의 폭을 어떤 방식으로든 넓혀줬다. ‘어떤 방식으로든’이라는 요 부분이 중요한데 전형성을 완전히 벗어났거나, 허무맹랑하지만 묘하게 마음이 가는 이야기들은 잔뜩 굳어버린 내 머리에 싱그러운 레몬즙을 촤악 뿌린 듯 청량함을 줬다. 머리가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니 연육 작용을 하는 키위즙이 더 맞으려나? 아무튼 영화제는 나에게 작지만 분명한 비일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다. 그 세계를 통과할 때는 내 태도가 조금 더 정중하고 또 관대해진다는 특징도 있다. 창작과 구현에 관한 존중, 아무리 짧은 단편영화도 한참 올라가는 엔딩크레디트에서 알 수 있듯 팀 작업에 관한 존중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한 명이 쓸 수 있는 소설, 시와는 달리 영화는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과의 협업을 전제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세계가 섞이고 더해진 결과물인 것. 때로는 채 영글지 않아 떫은맛이 나더라도 그 결과물들을 목격하는 게 좋았다. 거기에서는 하나같이 풀을 잔뜩 뜯었을 때 나는 연둣빛 생명의 향 같은 게 났다.

영화제라는 작고 분명한 세계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단조롭던 내 일상의 시공간이 한 번씩 크게 뒤틀렸다. 날것의 에너지를 받는 느낌이랄까. 내 첫 책 〈친절한 뉴욕〉의 아이디어도 2006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보고 난 후 들른 맥줏집에서 수다를 떨다가 탄생했다. 영화제 관람 기간에는 시시껄렁한 아이디어도, 현실감 없는 기획들도 망설임 없이 입 밖으로 나왔고, 금세 동실동실 살이 붙었다.

20년 만에 처음 만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9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의 제천행. 오랫동안 기다리던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일정이었다. 첫 방문이었지만 그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야외에서 상영하는 음악영화의 생동감과 록 페스티벌 같은 분위기의 부대 행사들이 여느 영화제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평(몇 년 전 버전이기는 해도)을 들어왔다. 마침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했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일정을 뺐다. 스무 살을 맞은 영화제라… 그간의 노하우들이 또 얼마나 근사하게 쌓였을까.

“영화제에서 공연하다가 사고 났었대. 뉴스 봤어?” 제천행을 하루 앞둔 날, 같이 떠나기로 한 친구가 영화제에서 있었던 사고 뉴스를 전했다. 9월 6일 청풍랜드 특설무대에서 진행된 음악공연 ‘원 썸머 나잇’에서 무대 위 특수효과용 불꽃에 관객 17명이 화상을 입은 것. 당시 사고 영상을 보니 불꽃의 방향이 완전히 관중들을 향해 있었다. 운영 미숙.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오랫동안 기다리던 제천행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서울에서 일찌감치 출발해 오후 1시에 시작하는 첫 영화 상영관인 청풍리조트 컨벤션홀로 향했다. 고속도로에서 바로 들어와서일까, 아니면 여덟 개의 상영관 중 비교적 도심에서 떨어져 있는 곳이기 때문일까. 부천이나 부산에서처럼 도시 곳곳에서 느껴지는 영화제 무드–플래카드라던가, 가로등에 걸려 있는 배너 같은–가 거의 없었다. 청풍리조트 내에도 건물 안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여러 번 헤매다가 겨우 컨벤션홀을 찾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안내 데스크에는 사람이 없었고 거리나 건물 안에도 인구 밀도가 현저히 적었다. 그렇게 상영 시간을 10분 남기고서 겨우 컨벤션홀에 입장했다.

멀티플렉스 상영관에 익숙해 있던 내 눈앞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단차 없이 띄엄띄엄 놓인 100개가 채 안 되어 보이는 접이식 의자들, 기업 워크숍 때나 쓸 법한 자그마한 빔 프로젝터 스크린. 여기가 맞나 싶은 표정을 지으며 어정쩡하게 착석하는 관람객들. 온라인 예매를 할 때에 비지정석이라고 표기되어 있어 상영관의 규모나 형태에 관해 알 수가 없었다. 같이 간 친구와 함께 쭈뼛쭈뼛 그나마 스크린이 가장 잘 보이는 앞줄에 자리를 잡았다. 이거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는데 싶었지만, 또 이런 게 영화제의 맛이지 내심 마음을 다잡았다. 연신 손부채질을 하는 사람들 너머로 암전이 되자 곧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 〈하와이 연가〉(©CGV ICECON) 스틸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 하와이로 떠난 조선인들의 역사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아카이브 음악 다큐멘터리 〈하와이 연가〉. 사진 신부로 하와이에 간 ‘임옥순’의 여정, 한국의 소록도와도 같은 ‘칼라우파파’에 격리된 채 쓸쓸한 죽음을 맞아야 했던 ‘김춘석’의 삶을 조명한 영화다. 하와이의 광활한 풍경과 함께 리처드 용재 오닐, 김지연, 이그나스 장의 바이올린 연주가 세 개의 옴니버스 단편 사이로 흘렀다. 관심이 가는 소재였지만 영화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았다. 영화의 사운드가 조금만 커져도 스피커에서 날카로운 기계음이 섞여 나왔고, 자세를 바꿀 때마다 의자에서는 자꾸 삐그덕삐그덕 소리가 났다. 영화에만 집중하게 해주는 지극히 평범한 상영관이 이렇게 절실해질 줄이야.

다음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오전 10시에 예매한 〈프리스타일 국내 단편〉은 세명대학교 블랙박스 실험극장에서 상영되었는데 역시나 가는 길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에도 상영관에 관한 별도 안내가 없었다. 이번에는 자그마한 연극 연습실 같은 공간에 편의점 파라솔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들이 임시로 만든 단차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1시간 30분에 걸쳐 네 편의 국내 단편이 상영되었는데 작은 규모는 그것대로 아늑한 느낌이라 쳐도 중간중간 귀를 찢는 듯한 스피커 소리는 정말 곤혹스러웠다. 음향 시스템이 역대급으로 열악했다. 아시아 유일의 국제음악영화제라는 타이틀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적어도 음향만큼은 신경 써야 하지 않았을까. 앞 좌석에서 오른쪽 귀를 막고 영화를 보던 두 관객은 결국 중간에 상영관을 나가버렸다. 나와 일행도 몇 번이나 귀를 막으며 꾸역꾸역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 〈헨젤, 두 개의 교복치마〉를 연출한 임지선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를 하고 있다.

영화관 없는 도시에서 치르는 영화제

사실, 올해 제천은 영화관 없이 영화제를 치러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었다. 지난해 연말 하나 있던 CGV 제천점이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제천은 영화관 없는 도시가 되었고 시민들은 영화를 보려면 강원도 원주시나 충청북도 충주시까지 가야 했다.

영화제 주최 측 입장에서도 초비상이었을 것이다. 영화제 70% 정도의 영화를 상영하던 주 상영관이 사라진 셈이니. 제천예술의전당과 제천문화회관, 세명대 태양아트홀, 세명대 블랙박스 실험극장, 제천영상미디어센터 봄, 의림지자동차극장, 청풍리조트 컨벤션홀, 포레스트 리솜 특별상영관까지 총 여덟 개의 대안 영화관이 꾸려졌다. 그중 나는 가장 열악한 두 개의 상영관을 경험한 듯하다.

지난해 열린 19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주요 상영관은 CGV제천을 포함해 모두 세 곳으로, 이들 상영관은 모두 2~3km 반경 내에 위치했다. 이곳들을 직선거리로 연결한 거리는 약 7km. 하지만 올해 여덟 개 상영관을 직선거리로 연결한 거리는 약 52km에 이른다. 그만큼 이동 동선이 길어졌다는 이야기다. 청풍리조트에서 제천예술의전당까지는 차로 30분은 가야 한다. 나는 그나마 자동차로 움직여서 덜 고생스러웠지만 셔틀버스를 타고 상영관 사이를 이동한 관객들은 예매한 영화를 포기하는 일도 잦았다고. 그나마 셔틀버스도 시간표대로 운행하지 않아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영화제 예매 사이트도 개막 일주일 전에야 열렸다. 숙소나 동선 계획을 짜기에는 너무 촉박한 시간. 적어도 개막 2~3주 전에 예매 사이트를 오픈하는 다른 영화제들과도 구분되는 지점이다. 20년을 거쳐 이제 어엿한 성인의 시점으로 접어든 영화제의 모습치고는 너무나 기본적인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삐져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지난 7월 개관한 제천예술의전당.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개막식과 폐막식이 진행된다.

지역 영화제가 풀어가야 할 난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니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비롯한 지역 영화제들의 부침이 요 몇 년간 부쩍 극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예산 문제다. 정부는 긴축재정 명목으로 올해 각종 영화제 지원 예산을 지난해 절반인 24억 원으로 줄였다. 그나마도 카테고리를 통합, 국내외 영화제를 묶어 지원하는 바람에 지원 대상 영화제 수도 40여 개에서 10개 안팎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그간 국고 지원을 받던 제천국제음악영화제도 예산 대상에서 탈락, 지자체의 예산으로만 운영비를 충당해야 했다. 2022년 제천시가 예산 문제로 영화제 집행위원장과 사무국장을 해임(올 초 법원은 제천영화제의 임직원 징계 해임·변상 명령은 절차상 하자가 있어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한 후 새로운 집행부를 꾸렸다는 점도 영화제 운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간 쌓아왔던 운영의 노하우나 프로그램의 일관성에 영향을 줄 만한 이슈이기 때문. 여기에 지방선거라도 거치면 더 큰 변수들이 물밀듯이 개입할 수 있다. 영화제라는 본래의 정체성과 그 영화제 실행을 가능케 하는 예산과 조례 등 각종 행정적 접근, 점점 밀도가 낮아지는 지역 인구 감소 문제, 그에 따른 인프라 변화까지 지역 영화제가 풀어야 할 난제들은 여전히 산적해 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식이 열린 제천예술의전당은 학생 수 부족으로 이전한 동명초등학교의 빈터로 남아 있던 부지에 건축된 복합문화 예술공간이다. 학생 수가 부족해 초등학교를 이전하고, 영화 관람객이 줄어 경영난으로 영화관이 폐업하는 현실. 수도권이 아닌 지역들의 이러한 인구 감소 현상은 앞으로 더 극심해질 테고, 영화를 향유하는 채널이나 방식은 점점 더 진화하고 고도화될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의 선의나 호의에만 기대서는 영화제의 지속 가능성을 점치기 어렵다. 지난 20년간 음악과 영화라는 명확한 콘셉트를 지켜온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조금 더 정교해지기를, 완성도에 관한 기준을 끊임없이 자체 갱신해나가기를 관객으로서 바란다.

1938년 11월 26일, 부민관과 〈조선일보〉 본사 대강당에서 조선영화 전람회, 조선영화 시나리오 현상모집을 비롯해 조선영화 감상회가 열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제로 일컬어지는 행사다. 그로부터 86년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에만 5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영화제들이 매년 관객들을 맞이한다. 어워드나 필름 마켓의 기능뿐 아니라 특정 지역의 문화적 토대를 쌓고, 이를 구심점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새로운 문화적 씨앗을 심어주는 기초 예술의 영역이다. 몇십 년을 잘 살아남은 영화제들이 벌목의 위험 없이 저 깊은 땅속에 단단히 뿌리내리길. 그 나무에서 맺힌 튼실한 열매들을 매해 와그작 베어 무는 나를 상상한다.


김선미

서울 북아현동에서 기획 및 디자인 창작집단 포니테일 크리에이티브를 운영하고 있다.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 결국 반짝이는 것들에 관해 꾹꾹 눌러쓴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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