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송희
당연히 한 줄로 축약할 수 없겠지만, 소설가 한강을 떠올리면 나는 가장 먼저 고통이라는 단어부터 입에 되뇐다. 세상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작가가 고통스럽게 쓴 소설을 독자 역시 고통스럽게 읽게 되고 그 고통은 쓴 이, 읽은 이 모두에게 각인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집어 들기 위해서는 다소의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2015년 황순원문학상 소설집에서 이 단편소설을 처음 접했다. 이 중 어떤 문장 하나가 내게 깊이 들어와버려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고 싶어서 SNS에 받아 적었던 기억이 난다. 다음의 문장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까다롭고 유난하고 피곤한 선택들로, 그러나 자신으로선 다른 방법을 생각해낼 수 없었던 유일한 선택들로 이루어진 것이 그녀의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회사의 부당해고에 맞서 싸우며, 1년여 가까이 사내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출근했던 경주 언니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그의 장례식장을 찾아가던 주인공이 죽은 언니를 회고한 문장이다. 이 소설에는 ‘잃어버린 사람들’이 두 명 나온다. 부당해고에 맞서 싸웠으나 지금은 죽고 사라진 경주 언니, 그리고 또 다른 방식으로 부당함에 맞섰으나 그 역시 죽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은 선배. 그중 덜 친했던 선배의 영혼이 주인공의 집에 찾아오며 소설이 열린다. 한강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소년이 온다〉의 집필을 끝낸 후 죽은 선배의 소식을 3년 만에 전해 듣고 이 단편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그 무렵 광화문을 지날 때마다 눈과 가슴을 찔렀던, 영영 잃어버린 아이들을 위한 천막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무엇인가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여전히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평화란 속히 오지 않을 듯 보이고,(아니, 불가능한 것 같고) 삶은 아득하기만 하다. 이 와중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는 계속 쓴다고 했고 나는 계속 읽을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고통을 떠올린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세상에 그것이 있음을 인지하고 또 같이 아파하는 일. 그것이 가능함을 나는 안다.
〈소년이 온다〉
글. 김윤지
아마 〈소년이 온다〉는 완독하기에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던 소설이 아니었나 짐작해본다. 한강 작가의 소설은 결코 가볍게 읽히는 법이 없다. 마음을 단단히 했건만 그럼에도 책장을 넘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날의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사체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혼이 되어 썩어가는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는 소년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데서 오는 무력감.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죽지 말아야 했을 이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고, 꽤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결말을 마주할 수 있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그곳에서 열흘간 벌어진 상황과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소설은 열다섯 소년 동호가 친구 정대의 죽음을 목격한 후, 도청 상무관에서 시신들을 관리하는 일을 돕게 되면서 시작된다. 2장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정대의 영혼 시점에서 전개되는데, 이때 정대가 동호의 혼을 느끼며 그 또한 죽음을 맞이했음을 알게 된다. 집에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던 동호는 어째서 상무관에 남았는지, 왜,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답이 정해진 질문이 뒤를 잇고, 작가는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은 채 남겨진 이들의 일상을 비춘다.
국가의 폭력은 개인의 일상을 파괴한다. 상무관에서 일하던 선주, 은숙, 진수는 살아남아 그 이후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일상이 5월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때로는 살아 있다는 것이 고통으로 다가온다.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는 은숙은 담당 원고의 검열 문제로 경찰서에 끌려가 ‘일곱대의 뺨’을 맞는 치욕을 겪기도 한다. 그리고 은숙은 종종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도 상무관에 남겠다고 말하던 동호를 떠올린다. 우리는 살아남은 이들의 입을 통해 동호의 이야기를 듣고, 결말에 가서는 끝내 외면했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소설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동안은 일상을 살아내다가도 문득 소년이 떠오른다.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치다 채석장으로 공이 넘어가면 서로 주워 오라며 가위바위보를 하던 동호와 정대. 돌아갈 수 없는 사건 이전의 일상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라는 소설 속 문장이 마음속에 깊이 박힌 이유다.
〈채식주의자〉
글. 안덕희
이상한 꿈을 꾼 뒤 고기를 먹지 않는 아내는 하루하루 마르고 병자처럼 핼쑥해져간다. 그런 딸을 두고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까지 받은 대가 센 장인어른은 ‘나’에게 말한다. “내가 면목이 없네.” 그리고 얼마 뒤 있은 처형네 집들이에서 장인은 “이 애비 말이 말 같지 않아? 먹으라면 먹어!” 소리치며 딸의 뺨을 후려친다. 결국 장인은 아내의 입에 강제로 탕수육을 쑤셔 넣는다. 한번 먹으면 다시 먹기 시작할 거라며.
자신이 먹은 너무 많은 고기의 목숨들이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것만 같은 영혜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이해하려는 이는 없다. 가족의 몰이해는 곧 폭력으로 이어진다. ‘딸 가진 게 죄’라는 말이 통용되던 한국 사회에서 남들과 조금 다른 딸은 사위 보기 면목 없는, 어떻게 해서든 고쳐놓아야 하는 대상이었다. 무식한데 욕심 많은 부모는 자식에게 위험하다. 여기서 ‘무식’을 다른 사람의 가치관, 삶의 선택에 대한 존중이 끼어들 틈 없는 편협함으로 보았을 때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그것이 폭력인지도 모르고 가해지는 강제적인 것들이 총망라된 것 같은 〈채식주의자〉를 부모가 된 후 다시 읽으니 내게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폭력이 더욱 날것으로 다가왔다. 내가 자녀일 때에는 무감각했던 것이 오히려 부모가 되니 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무의식중에 부모에게 받은 폭력을 내 아이에게 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검열과 검열을 거듭해도 몰랐던 강제성을 〈채식주의자〉에서 느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채식주의자〉가 발간된 게 2007년이니 무려 17년 전이다. 그사이 한국은 아동학대나 부모교육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며 자식에게 신체적 위협을 가하는 것이 폭력임을 인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대됐다. 하지만 그 폭력성은 물리적인 것이 아닌, 다른 형태로 더 심해진 것 같다. 자녀에게 과도한 사교육을 시키고 극한의 학업 스트레스를 주며 마음이나 정신을 때리고 병들게 하는 부모가 늘었다. 내 주변의 많은 학부모들이 ‘다들 그렇게 하니까’라는 이유로 아이들의 자율성보다는 보편성을 가장한 획일성을 강제한다. 자신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아들과 함께 카모마일 차를 마시며 축하했다는 한강 작가는 원래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폭력적이지 않은 부모가 된다는 게 어렵다는 것을 작가는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채식주의자〉는 세상의 폭력에 맞서다가 결국은 식물이 되기를 선택한 여성의 조용하지만 뜨거운 저항이 담긴 책이다. 왜 우리는 폭력을 폭력인지도 모르고 가족, 타인에게 가하는 것인가. 거기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왜 ‘예민하다’, ‘특이하다’는 굴레를 씌우는 것인가. 〈채식주의자〉가 내게는 그런 책이었다. 내가 모르고 행했던 모든 말과 행동을 돌아보게 하는. 브레이크 없이 내달리는 한국 사회에 이런 소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희랍어 시간〉
글. 황소연
뭔가 배운다는 건 연속과 종료 중 어느 쪽을 의미할까? 결승선을 통과하듯 초급과 중급, 고급의 단계를 지나 숙련자가 된다면 수업의 목적은 달성된다. 그런가 하면 학습을 위해 주입과 연습을 반복하는 건 지난하다. 시간을 꼼꼼하게 거쳐야만 하고, 의욕을 유지해야 한다. 〈희랍어 시간〉엔 고대 그리스어를 배우는 여자와 이를 가르치는 남자가 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또 갑자기 닥쳐온 신체의 불편함을 받아들이려 애쓴다.
소설에서 ‘말’은 무겁고도 아프다.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서간은 그 슬픔의 시간이 짐작되고, 여자가 들은 말들은 폭우처럼 날카롭고 잔인하게 쏟아진다. 그래서 두 사람이 언어, 그것도 사실상 사어로 인식되는 고대 그리스어를 배우고 다루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나도 모르게 주목하게 되는 흥미진진한 선택이다. 그 의욕은 어디서 길어 올려진 것일까? 독자들은 책을 덮기 전 나름의 답을 찾게 된다.
언어는 우리를 구속하기도, 자유롭게도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동네의 흔한 풍경, 어쩌면 누군가는 그저 그렇다고 생각될 장면을 소중히 편지로 써내는 남자에겐 일상에 애정을 품은 사람이 가지는 따뜻함이 있다. 모든 것이 파괴되는 고통 속에서도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말’을 하거나 쓰는 여자에게서 생의 불씨를 본다. 책을 읽으면서 인류를 옭아매고 또 방목해온 언어들을 구글링했다. ‘더 낯선 언어가 있으면 그것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여자의 말이 맴돌아서다. 버마어, 아람어, 산스크리트어…. 어느 언어엔 ‘공용어로 쓰는 나라 없음’이라는 설명이 덧붙었다.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는 아닐지라도, 누군가는 사용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현대의 작은 교실에서 목소리가 된 희랍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