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사진. 황소연
총 3권으로 구성된 추리소설 〈레이디 조커〉의 마지막 장 제목은 ‘1995년 가을-붕괴’다. 스포일러가 될까 자세한 내용을 말하긴 어렵지만 ‘리얼타임’과 책 속의 계절이 일치하는 묘한 감정을 공유하는 건 가능하다. ‘가을의 향수를 일으키는 헤르만 헤세의 책’을 주제로 하는 서점의 이벤트 마케팅까지 보니,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계절은 확실히 무언가에 집중하기 좋은 때인듯 하다. “이리하여 매장되어야 했던 것은 소생하고, 사라져야 했던 것은 사라졌을 ‘터’였다. 그러나 현실은 다른 법이라 이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레이디 조커〉가 묘사하는 1995년 11월 늦가을이다.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지만, 설레는 소식은 찾아왔다. 한강 작가가 아시아 여성 최초,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사람들은 서점 출입문 바깥까지 줄을 섰다. 교보문고는 ‘독서붐이여 오라! 노벨문학상이라는 큰물에서 노를 젓고 싶은 도서 MD들의 큐레이션. 이왕 들어오신 김에 둘러보세요!’라는 귀여운 팝업을 띄웠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팀은 ‘벌써 여섯시가 넘었으니 서랍에 저녁 넣어두어야겠다’는 ‘드립’으로 웃음을 줬다. 축하는 역시 순수한 힐링이다.
과거에는 책은 과연 무엇인지, 책의 정의를 요청하는 질문이 많았다면 지금은 모두가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조곤조곤 답하는 시대인 듯하다. 그 과정에서 책이나 독서가 놀이나 인증과 과시의 도구, 혹은 멋진 소품도 되는 게 뭐 어떤가 싶다. 한강 작가는 글을 “알 수 없는, 그렇지만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미지의 당신들을 위해서 쓰고 있는 편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편지도, 소품도, 놀이도 되는 게 책의 운명 아닐까.
게다가 책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단답을 하지 않는 매체다. 심지어 단답을 지향하는 내용의 서적(당신의 인생을 바꿀 n가지 아이디어 같은 식)마저도 단답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세상엔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계속된다. 가장 깊은 허무의 원천일지라도, 결국 가장 깊은 인류애의 원천이 되는 책의 존재를 실감하게 해준 한강 작가에게 많은 독자들이 손을 흔든다. 당신의 편지를 잘 받았다는 답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