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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30 인터뷰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 식물과 시

2024.12.13

〈땅에 쓰는 시〉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선유도공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등으로 잘 알려진 정영선 조경가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영화에 담긴 모습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명품 브랜드 매장의 조경을 하는 모습이었어요. 서울에 있는 프랑스 브랜드의 정체성에 맞게 두 나라의 장미와 모란까지 골고루 심고 있었는데, 매일 식물을 만지는 그녀의 손끝은 투박하고 손톱 사이엔 흙이 껴 있었습니다. 어느 인부들과 함께 작업할 때는 평범한 할머니 같아 보이고, 그 한없이 소박한 모습에서 자신의 일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느껴졌습니다. 김수영 시인의 〈풀〉이라는 시를 좋아한다고 해요.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조경가가 아니었다면 아마 시인이 되었을 거라 말해요. 어쩌면 우리 주위에 있는 식물을 돌보고 다루는 일이 언어로 시를 쓰는 일과 비슷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제게 ‘식물과 시’ 하면 떠오르는 친구 희준의 해방촌 집을 찾았습니다.


글. 정규환 | 사진. 김강민

해가 잘 드는 이 시간에 불러줘서 고마워. 먼저 집에 있는 식물을 소개해줘.

주로 아픈 식물을 집에서 돌보고 있어. 운영하는 식물 가게가 집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거든. 매장에서 식물을 관리하다 보면 아픈 식물이 생겨. 매일 아침마다 애들 상태를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아파 보이거나,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식물이 보이면 집으로 데려와서 조금 더 세심하게 돌보곤 해.

언제부터 집에서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어?

어렸을 때부터 베란다에서 식물을 키우는 게 취미였어. 대학생이 되고 서울에 살면서 자취를 쭉 했었는데 그때도 항상 집에 식물이 많았어. 식물 가게를 운영하고 나서는 내 주위에 어딜 가든 식물이 많게 됐지. 이사를 자주 하다 보니까 집마다 환경이 다르고, 어떤 환경에서 식물이 잘 적응할 수 있는지 공부가 되기도 했어.

사람 가구보다 식물을 위한 가구가 더 많은 것 같아. 식물이랑 같이 사는 건 어때?

식물이 한창 성장하는 여름철이나 건조한 겨울철엔 물을 많이 빨아들여. 그래서 일주일에 두세 번씩 물을 챙겨줘야 하거든. 그걸 ‘물시중’이라고 불러. 배고픈 아이가 우는 것처럼 식물이 풀이 죽어 있을 때마다 챙겨줘야 해. 특히 매장에 화분이 거의 200개는 되니까 계속 물시중하다가 집에 와서도 식물들이 물 달라고 하면 속으로 ‘그만하고 싶어’라고 우는소리를 하곤 해. 식물에 물 주는 생활에 익숙해진 것 같아.

단순히 플랜테리어로서의 식물이 아니라 식물과 같이 살고 있는 집의 느낌이야. 이 집은 사람과 식물이 함께 살기 좋은 집처럼 보여. 이 집의 매력이 궁금해.

우선 집이 세로로 길어서 좋아. 거실이 마치 복도 같기도 하고 동선이 생겨서 넓은 느낌이 들어. 양쪽에 창이 있어서 바깥 풍경이 잘 보이고 자유로워. 아침에 해가 확실하게 들어와서 좋아. 날씨가 좋은 날엔 창을 활짝 열고 있어. 다행히 내가 추위에 강한 편이거든. 그리고 천장이 나무로 되어 있는데, 구옥 인테리어가 남아 있어서 따로 크게 꾸미지 않아도 집이 예뻐 보여. 집이 원래 가진 매력을 살리면서 살고 있어.

해방촌에서 살고 일하면서 느낀 이곳의 매력은 뭐야?

이전에 살던 보광동이 재개발에 들어가면서 인근인 해방촌으로 오게 됐어. 마침 이 집 근처에 식물 가게 오픈을 준비 중이었거든. 가게와 집이 가까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일단 서울의 중심이라 어디 갈 때 교통이 편한 게 좋아. 그리고 남산 밑이라 동네 자체가 양지바른 언덕 느낌이야. 이웃 어르신들도 토박이 느낌이랄까. 이 동네에 오래 산 애정이 느껴져. 집집마다 오래 키운 식물이 많아. 나도 골목을 지나면서 화분을 구경하고 만져봐. 해방촌은 시간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서 매력적인 것 같아.

식물 가게를 하기 전에는 원래 시를 썼잖아. 요즘은 어때?

창작이 아닌 생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와 멀어졌어. 그래도 시를 읽던 습관이 남아 있어서 심심하거나 기분이 공허할 때 종종 시집을 읽기는 하거든. 그럴 때 읽는 이 시집을 참 좋아해. 김정환 시인의 〈희망의 나이〉(창작과비평사, 1992)라는 오래된 시집인데 사회성과 서정성에 관한 이야기를 해. 여전히 시로부터 위로랑 응원을 받나 봐.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다.

시인은 누군가 시를 더 이상 읽지 않게 되는 게 사회성이 한 사람을 덮쳐오기 때문이라고 말해. 그럼에도 살면서 중간중간 시를 읽고 싶은 건 자기 안에 서정성이 살아 있어서 새싹처럼 꿈틀꿈틀 튀어나오기 때문이라고 표현하거든. 사회성이나 서정성이 인간 안에 공존해야 하는데 그 둘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자는 메시지를 환상적으로 표현한 시집이야.

시나 식물처럼 흔히 이야기하는 부드러운 것에 끌리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좋아하는 일들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드럽다고 느껴지는 것들을 추구하게 된 것 같아. 조금 다르게 말하면 내가 서정적인 일을 좋아하고, 잘 맞는 것 같아. 시를 쓸 때도 식물이나 나무라든지 낙엽이라든지 피고 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썼어.

희준에게 식물이 주는 인상은 뭐야?

식물을 죽여서 속상하다는 한 친구가 있었어. 내가 그 친구에게 식물을 현상으로 이해해보라고 했거든. 이를테면 향초를 태우면 연기가 나고, 시간이 지나면 향만 남잖아. 식물도 우연히 씨가 발아해서 싹이 나고, 자라고, 적응하고, 언젠가 죽고 이 모든 것들이 누구의 탓이나 책임도 아닌 하나의 현상이라고 생각을 해왔어. 내가 돌보는 식물도 자연의 일부를 잠시 빌려온 거고. 지금 눈앞에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이상하게 위로가 돼. 모든 게 당연하고 괜찮다는 느낌을 받아.

창가 밑의 식물들이 살랑살랑 잎사귀를 움직이는 게 마치 우리 이야기를 듣고 반응을 하는 것 같아. 끝으로 지금 가장 소중한 식물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어?

식물 가게를 하면서 식물에 대해 약간 무던해진 찰나에 우연히 당근마켓에서 이 고무나무를 발견했어. 처음엔 지금보다 작고 귀여웠어. 식물 가게를 하기 전 식물을 좋아하던 풋풋한 감정이 느껴져서 데리고 왔어. 이 고무나무를 볼 때마다 동심이 느껴져. 무엇보다 고무나무는 누구나 키우기 쉬워. 물을 많이 줘도 괜찮고, 인내심이 강한 식물이어서 어느 집이든 잘 자랄 거야. 모양이나 색깔도 다양해서 플랜테리어 식물로도 어디든 두고 키울 수 있어서 초보 식집사에게 추천해.


<희준과 식물>


#청미래덩굴

희준이 운영하는 ‘청미래덩굴’은 서울 해방촌의 신흥시장 인근에 있는 식물 편집숍이다. 평범한 골목 풍경에서 초록빛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가게로 들어가는 계단은 이끼로 덮여 있어서 마치 작은 숲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24시 유/무인 가드닝 숍으로, 누구나 키우기 쉬운 실내 식물부터 유니크한 디자인의 식물 화분들이 업데이트된다. 수태로 동그랗게 구슬처럼 연출한 ‘코케다마’, 투명한 글라스 안에 식물로 작은 생태계를 재현한 ‘테라리움’엔 주인공이 되는 식물과 희준의 창의성이 돋보인다. 식물 업계에도 꽃을 사용하는 ‘플로리스트’나 정원을 가꾸는 ‘가드너’처럼 장르와 이름도 다양하지만, 희준은 주로 ‘그리너리’를 다루는 ‘보태니컬 아티스트’다. 외부 작업이 없는 날엔 희준이 매장 뒤편에 마련된 비밀 작업실에서 새로운 작업들을 뚝딱뚝딱 만들어내고 있으니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다. 구매한 상품에 대한 자세한 온라인 1:1 상담까지 가능하니 초록빛 반려 식물을 들일 계획이 있다면 한번 방문해보길 추천한다.

#돌봄

식물을 돌보는 건 의의로 어려운 일이다. 집에 해가 잘 안 든다거나 슬프게 식물을 자주 죽인다거나 현실적인 여건으로 식물 키우기를 포기한 사람도 있다. 식물 돌보기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 식물을 잘 돌보기 위해선 어떤 방법이 있을까. “강하게 키우기를 추천해. 흙이 바짝 마르면 물을 준다거나, 식물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을 땐 아예 잎을 잘라봐. 대부분은 그 환경에 맞는 튼튼한 새잎을 내.” 물을 많이 주거나 잘 키워보겠다는 욕심으로 화분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보다 식물에게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을 주는 편이 좋다. 무심한 듯 방치하되, 지켜보는 마음으로 적절한 도움을 받으면 식물은 강하게 큰다. 한 장소에 두고 지켜보다 보면 반가운 새잎을 낼 것이다. 집이라는 화분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정규환

에디터. 도시생활자를 위한 팟캐스트 〈개인사정〉을 진행하며, 웹진 & 프로젝트 〈kyuhwan.kr〉을 운영 중이다. @Kh.inspiration

김강민

평일에는 옷을 만들고 주말에는 사진을 찍는다. @itskan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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