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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195 에세이

요즘 여자 이야기

2019.06.04 | 치킨은 문 앞에 두고 가세요

영화 <도어락> 스틸

“이 세상에서 또라이가 가장 많이 모인 곳은 어디일까?”

정답은 ‘회사’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나의 답은 ‘자취방 근처’였다. 대학 시절, 주변 지인들은 내 자취방 앞 골목을 ‘또라이들의 정모 현 장’이라고 불렀다.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다면 늦은 저녁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가지고 나오는 길에 만났던 자식이다. 옆에서 희미한 핸드폰 불빛이 비치기에 쳐다보니 전봇대 옆에서 바지를 내리고 있던 그는 왼손으로는 자기 위안을, 오른손으로는 그 행 위를 핸드폰으로 찍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도 못 들어봤냐!!!!”라고 고함을 지르며 동 네방네 쪽이라도 줄 걸 그랬다 싶지만, 그 당시의 어렸던 나는 무서운 마음에 냅다 건물 안으로 줄행랑을 쳤었다. 그 외에도 담배 피우 는 척하며 내 자취방 창문 안을 계속 훔쳐보던 놈, 한밤중에 문을 쿵쿵 두드리며 들여보내달라고 소리를 지르던 놈... 온 인생을 통틀어 도 만나기 힘든 이 미친 ‘놈.놈.놈’들이 내 자취 생활을 스릴러로 만들고 나서부터는 ‘8년 차 자취 여성’으로서 지켜야할 몇 가지 규칙을 익히기 시작했다.


1. 창문은 무조건 불투명 시트나 전지로 꼼꼼히 가릴 것.
2. 자기 전 보조키를 제대로 걸었는지 한 번 더 체크할 것.
3. 현관문에 남자 운동화를 놓거나 창문 쪽에 남자 속옷을 걸어둘 것.
4. 택배로 받은 박스에 붙은 종이는 분쇄기로 산산조각 내서 버릴 것.
5. 배달 음식은 직접 받지 않고 문 앞에 두고 가달라는 메시지를 남길 것.
(현금 계산을 해야 하는 경우 1층으로 내려가서 받을 것.)


이 번거로운 법칙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정기적으로 ‘성 범죄자 알림e’ 앱을 통해 가까이에 거주하는 성범죄자들을 체크 하는 일이다. 현재 사는 집 근처에는 강간 미수로 징역을 산 남성 이 살고 있다. 여섯 번의 강간상해죄를 저지른 사람이 살고 있는 이전 동네에 비해 조금은 나아졌다 말하기에도 뭔가 꺼림칙하다. 앱에 뜬 그들의 얼굴과 신상, 그리고 불과 1~2km도 안 되는 그들 과 나 사이의 거리를 볼 때마다 등골이 쭈뼛 설 정도로 불쾌함이 밀려온다. 이 사람들이 내 주위에 살고 있다는 것이 소름인지, 아 니면 누군가의 인생을 뿌리째 뽑아낸 범죄를 저지른 인간이 중년 도 되지 않은 나이에 사회로 돌아와 우리 틈에 섞여 살아간다는 것이 더 소름인지는 아직까지도 알 수 없다.

사실 자취하는 여성으로서 경계해야 할 것은 당장 집 근처에 있 는 낯선 타인뿐만이 아니다.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 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얘기는 “내 이상형은 자취하는 여자야”라든가 “자 취한다며? 남자 친구는 좋겠네~” 따위의 말이었다. 그들에게 자 취란 나와는 사뭇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듯했다.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자취하는 여자’를 하나의 성적 이미지로 소비하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장 구글에 ‘자취하는 여 자’라고 검색만 해봐도 내 안에 그나마 남은 인류애마저 멸종시 키는 저질스러운 이미지와 글이 쏟아져 나오니 말이다. 하물며 자취하는 여성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바탕으로 한 야동도 있으니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사고 회로가 얼마나 뒤틀린 것인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영화 <도어락> 스틸

혼자 사는 여성의 두려움을 다룬 스릴러 영화가 개봉을 하고, 창 문 잠금장치나 경보기 같은 셀프 보안 템이 여성들의 장바구니 에 담기며, #이것이_여성의_자취방이다 같은 태그와 함께 주거 공간 안에서 마주했던 성범죄와 스토킹에 대한 증언이 쏟아지는 미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이 사회에 만연한 두려움 의 크기에 비해, 그걸 진정으로 공감하는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아 속상할 때가 많다.

홀로 사는 여성의 집에 침입해 성폭행을 시도한 배달원, 약 70여 명의 자취 여성의 개인정보를 수집해 사랑 고백 문자를 보낸 중 국집 사장,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취할 수 있는 조치 가 없다고 말하는 경찰. 이런 타이틀이 붙은 뉴스가 포털 사이트 메인을 허다하게 장식하는 와중에 “왜 남성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하냐”, “요즘 여자들이 너무 예민하다”, “여자가 문단속을 잘못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거 아니냐”는 댓글이 눈에 띌 때면 한 숨이 절로 푹푹 나온다. 그들은 여성을 피해망상 환자에, 눈에 불 을 켜고 달려드는 ‘예민보스’이자 범죄의 원인 제공자로 치부하 는 것이 범죄자를 없애는 해결 방법이라고 믿나 보다.

영화 <도어락> 스틸

한 번씩 지인들에게 “조심해서 나쁠 거 없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는데, 맞는 얘기인가 싶다가도 어딘가 분해진다. 이젠 바깥도 모자라 내가 내 집 안에서도 조심해야 한다니. 애초에 집은 내가 가장 편해야 하는 장소 아닌가. 내가 가정을 꾸리지 않는 이상 향 후 최소 30년은 자취를 이어나갈 텐데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 지할 이 공간에서 끊임없는 두려움에 갇혀 산다면 이건 집이 아 니라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아닌가. 진정으로 감옥에 갇혀야 할 이들은 당당히 사회에 나와 생활하고, 피해자들의 자취 생활이 수감 생활로 변하는 것도 참 웃기지만 말이다.

누구나 자신의 집에서는 편안하고 싶다. 고된 직장 생활에서 돌 아와 한적하게 쉴 수 있는 곳,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사생활 을 보호받는 곳, 마음 편하게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곳. 그런 곳 에서마저도 굳이 불편한 일을 만들고 싶지도, 불편한 마음을 안 고 살아가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여전히 치킨을 문 안에서 받는 것이 문 밖에서 받는 것보다 편한 세상에 살아가는 나로서는 이 런 고민을 하는 사회가 서럽다. 언제쯤 ‘홈 스위트 홈’이라는 말 을 마음 편히 쓸 수 있는 사회가 올지, 아직까지도 참 먼 미래의 일만 같으니 말이다.

Editor 정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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