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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04 에세이

만화의 우주

2019.06.18 | 이토록 보통의 사랑

영화 <더 테이블> 스틸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나를 몇 번째로 사랑해?”
“그건 우리가 헤어진 후에 확실히 알지 않을까.”

예전 애인에게 받은 질문 중 가장 헛웃음 나온 질문. 이미 지나간 사랑은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다면 좋았을 텐데 상처를 줬다. 그 사람은 편지에 매번 저때의 내 대답을 끌어오며 우리가 헤어질 일은 없을 테니 몰라도 된다고 했다. 신기했다. 모든 연인이 그러하듯 남들 눈엔 평범한 연애지만, 우리는 특별하다고 여겼다. 다만 내겐 과분한 그 애정이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항상 끝을 생각하고 연애를 시작하는 나와, 우리 관계에 끝은 없을 거라 믿는 그 사람. 헤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사이니까 헤어지지 않기 위해 서로가 노력해야 하는 게 연애라고 생각하는 내 말을 그 사람은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리는 결국 헤어졌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몇 번의 연애를 더 하고 나니, 이제는 그 사람의 얼굴도 목소리도 점점 기억에서 옅어졌다. 그때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영화 <더 테이블> 스틸
영화 <더 테이블> 스틸
영화 <더 테이블> 스틸

작년 여름, 서점에 갔다가 뜬금없이 옛일이 떠올랐다. 그리워서도, 보고 싶어서도 아니고 정말 불현듯. 인연은 끝났지만 한 달에 한 번씩 다양한 장르로 책 다섯 권, 음반 다섯 장을 사던 그 사람의 습관은 오랜 기간 내게 배어 있었다. 음반에서 음원을 추출해 MP3에 담고, 짧게라도 책 감상문을 남기곤 했다. 음원 시장이 활발해지고, 종이책 대신 전자책을 읽기 시작한 후로 나는 그가 남긴 습관으로부터 자연스레 멀어졌지만 말이다. 재개장한 서점을 둘러보다 만화 코너 앞에 멈춰 섰다. 예전에 그 사람이 고른 다섯 권의 책 중엔 항상 만화 단행본이 섞여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산 만화책이 뭐였더라….

서점 직원에게 사랑 이야기나 여운이 짙게 남는 이야기가 좋다고 하니, 제일 좋아하는 웹툰이라며 망설임 없이 추천해준 <이토록 보통의>. 카페에 앉아 커피 마시는 것도 잊은 채 책만 읽었다. 보통의 사랑이라기엔 조금은 일반적이지 않은 장애물들이 등장하지만, <이토록 보통의> 단편 속 주인공들이 하는 사랑은 우리가 하는 사랑이 맞았다. 특별한 것 같지만 몇 발자국 떨어져 보면 보통의 사랑, 보통의 연애, 그리고 사랑이 끝난 후 남는 뒷맛까지. 나는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기억해냈다. 너무 아파서 묻어두고 싶던 기억.

사랑이란 감정은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말해놓고서 가능성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는 것이 그 얄팍한 감정…. -<이토록 보통의>, ‘무슨 말을 해도’ 중에서

ⓒ문학테라피

우리 관계는 가능성으로 무너졌다. 그는 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더 이상 그의 사랑을 사랑이라 부르지 못했다. 나는 그 감정을 불안, 집착, 소유욕이라 불렀다. 변질된 사랑의 감정에 휩싸여 스스로를 좀먹는 그의 모습에 지쳐갔고, 내 미래를 자기 멋대로 그리는 모습에 화가 났다. 벗어나고 싶었지만 차마 미워하지 못한 건, 변해버린 그의 모습에 내 책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는 어렸고 서툴렀다.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싸움을 위한 싸움을 했다. 사랑이 정말 변하는 걸까, 아니면 사람이 변하는 걸까. 우리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왜 네 미래에 나는 없느냐는 등 날 선 질문이 많아졌다. 현재 서로가 주는 애정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서로가 없을 가능성을 파고들었다.

“헤어지면 힘들어서 죽을지도 몰라.”
“죽을 것 같이 힘들어도 안 죽더라.”
“헤어지지 말자.”
“헤어져야 살 것 같아.”

그에게 건넨 송곳 같은 말들이 다른 연애에선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오기도 했다. 죽을 것같이 힘들어도 결국 일상에 적응했다.

처음엔 모두가 떠나고 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모두가 떠나고 나서야, 티타는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 것 같았다. -<이토록 보통의>, ‘티타’ 중에서

이때의 기억이 희미해진 건 늘 사랑이 끝날 때마다 상처를 주고받았기 때문일 테다. 분명 좋은 말만 해주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끝은 상처 투성이다. 시작은 전혀 달랐지만, 끝은 비슷했던 연애들. 각각의 연애를 빚어낸다면 우리의 사랑은 어떤 모양일까? 사랑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모습들이 오롯이 담길까, 아니면 상처 낸 부분만 움푹 파이고 뾰족 튀어나올까.

우리는 왜 서로를 특별하다고 했을까. 이토록 보통의 사랑이었으면서.

Editor 문지현

  • COVER STORY

    호昊 형제, 칸의 황금벨을 울리다

  • 커버스토리
  • INTERVIEW

    영화 <에움길> 이옥선 할머니 인터뷰

  •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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