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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06 컬쳐

각자의 여행서

2019.07.26 | 100일 후에 올 편지

엄마와 나는 각별하다.

엄마의 60년 인생에서 나는 34년, 그러니까 절반 이상을 함께 보냈으며 ‘엄마와 딸’이라는 두 단어만으로도 나는 그의 인생에서 내가 어떠한 존재이고 의미인지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우주가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 한다. (나만 그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둘이 여행이라곤 도통 가본 적이 없다. 가족 여행으로 함께 간 적은 있어도 온전히 둘이서만 간 적은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와 엄마의 여행은 캐리어에 짐을 담으면서부터 여기로 저기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캐리어를 준비해 공항에 도착한 후 출국장을 빠져나오기까지 엄마는 내가 ‘굼뜨다’는 이유로 우리의 우주에 여러 발의 포탄을 쏘아댔다.

비행기 출발 지연으로 옥신각신하는 시간이 늘어날 즈음, 마침 비행기가 상공을 날았고 우리에게도 평온이 찾 아왔다. 여행 준비로 꼬박 밤을 새운 터라 깊은 잠에 빠진 엄마 옆에서 난 항공사가 준비한 이벤트 ‘100일 후에 도착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눈을 흘기던 딸의 모습을 숨긴 채 손바닥만 한 엽서에다 엄마의 지난 인생에 위로를, 남은 인생에 응원을 보탰다. 그리고 다른 한 통에는 나에게도 심심한 인사와 악수를 건 넸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100일 후의 나와 엄마 에게 인사를 하고는 다낭에 도착했다.

연착으로 나와 엄마를 오래 기다렸을 것이 분명한데도 드라이버는 기분 좋은 웃음으로 우릴 맞아줬다. 베트남 이 처음이라 이것저것 물으며 조잘대는 내게 서투른 영어와 번역기까지 써가며 답하는 그가 베트남의 첫인상이 라 고마웠다. 그의 친절을 받아 도착한 호텔에 짐을 풀고 우리는 곧장 다낭 시내로 나갔다. 찌는 듯한 더위에 구경은 고사하고 서둘러 ‘콩 카페Cộng Caphe’로 향했다. 시원한 얼음에 달달한 코코넛 향이 우리네 믹스커피를 연상케 했다. 커피를 마시고 핑크빛이 맴도는 대성당을 한 바퀴 돌 즈음, 우리를 호이안까지 데려다줄 자동차가 성 당 앞에 도착했다. 그늘 하나 없는 성당 광장에서 엄마를 위한 사진을 찍어 주느라 무자비하게 땀을 쏟은 나는 냉기 가득한 차를 타자마자 소리를 질러 댔다. 다낭에서 호이안으로 향하는 한 시간은 내게 축복이었다.

베트남의 과거 모습을 간직한 호이안은 에어컨 시설에서도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카페를 가도, 음식점을 가도 강줄기를 끼고 형성된 군락은 뜨거운 습기를 내뿜었다. 더위로 입맛을 잃은 내게 베트남 코코넛 커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돌아다녔을까?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던 빠알간 해가 하늘을 오묘하게 물들이고 나 서야 나는 정신이 들었다. 그때 엄마 와 나는 투본강 나무배 위에 있었다. “누나~, 20분에 한국 돈 8000원.” 분명 저 소리에 발길을 배 위로 거침없이 옮긴 것도 같다. 할머니와 소녀가 함께 모는 작은 배였다. 엄마와 나의 소원을 위해 다섯 살 난 소녀는 능숙하게 라이터를 손에 쥐고 몇 번이고 불을 켜댔다. 어여쁜 노모와 소녀가 함께 빌어주는 소원을 투본강에 띄워 놓고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불볕더위에 녹초가 되어버린 나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호캉스를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의 추억을 위해 미리 예약해둔 그랜드 머큐어 다낭의 베트남 쿠킹 클래스를 찾았다. 5 성급 호텔의 쿠킹 클래스답게 준비가 어찌나 정갈하고 조용한지 이곳에서 정녕 클래스를 진행하는 게 맞나 싶었다. 이윽고 실제 호텔 셰프들이 주방에서 나와 엄마와 나 둘뿐인 바 앞에 서서 인사를 하고 클래스를 시작 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했다. 호수가 보이는 뷰를 끼고 멋들어진 셰프들이나 하는 모자와 앞치마 실리콘 장갑까지 장착, 영어로 진행하는 클래스를 들으니 정말 내가 뭐라도 된 냥 싶었다. 흔히들 알고 있는 새우스프링롤Goi Cuon Tom Thit을 시작으로, 빈랑잎에 베트남 젓갈로 양념한 다짐육을 바비큐 한 ‘Bo Cuon La Lot’, 그리고 연꽃 씨와 용안으로 만든 디저트 ‘Che Long Nhan’은 만드는 과정 그 자체로 즐거 웠다. 더불어 엄마를 위해 한국인 직원을 호출해 통역까지 해준 호텔 측의 친절에도 고마운 마음이 가득 들었다. 요리를 배우고, 그들과 함께 만든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은 다음 그럴듯한 수료증까지 받아 챙겼다. 더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이 모든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해준 덕에 그날의 추억이 USB 단자에 생생하게 남았다. 영상 속 나는 엄마를 위한 핑계랍시고 쿠킹 클래스를 간 사람이라 믿겨지지 않을 만큼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요리를 만들고, 떠들고, 웃고 있었다.

엄마와의 여행은 그곳을 떠나오기 직전까지 바나힐Bana Hill이라는 다낭 랜드 마크까지 찍고 마무리했다. 이토록 짧은 시간 동안 이 모든 것을 해냈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할 정도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엄마는 무척 즐거워했다. 그런 엄마를 보는 것으로 나도 즐거웠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이런저런 두텁고 무거운 생각의 굴레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다 엄마와 여행을 떠났다. 엄마의 즐거움을 보는 것으로, 뜨거운 해를 땀 흘리며 마주하는 것으로 나는 그 생각의 무게를 조금 덜었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생각을 거듭하는 중이다. 동시에 다낭으로 떠나는 길에 내게 썼던 엽서를 기다린다. 100 일 전의 내가 나에게 어떤 인사를 건 넬지, 또 100일 후에 나는 그때의 내게 어떤 화답을 할지 퍽이나 궁금하다.

Editor 손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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