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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17 컬쳐

2019년 미리 맞이한 망년회마스

2019.12.27 | 인싸들은 연말에 이리 놀아보시오

우발적인 선택이었다. 내가 사진 모임에 가입하게 된 건. 연이은 취업 실패로 나는 피로해졌다. 내겐 집 안팎이 아닌 새로운 피난처가 필요했다. 때마침 ‘안녕 친구들’이란 이름의 사진 모임이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줬다. 가입 조건은 단지 사진만 좋아하면 될 뿐, 그 어떤 스펙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가입 이후 바빠서 퍽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학교 동창처럼 깊은 사이가 됐다. 같은 취미를 공유해선지 모난 성격의 사람은 없다. 나이도 다르고 학교도 전공도 다르지만 죽도 잘 맞는 편. 우리는 만날 때마다 각자 기획한 무박 2일 홈파티, 스튜디오 빌려서 인생샷 찍기 같은 버킷리스트를 펼치곤 했다. 그리고 이번엔 조금은 이르지만 우리들만의 미리 망년회마스를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쓸모없는 선물로 웃음 한 보따리 챙기기
11월 29일 금요일. 친구네 집에서 한 달이나 이른 망년회를 미리 하기로 계획했다. 수다만 떨고 끝나는 식의 의미 없는 모임은 지양하고 의미 있는 모임이 되고자 일정을 세부적으로 구상했다. 망년회의 시작은 일단 쓸모없는 선물 교환을 하기로 약속했다. 즉흥적으로 낸 의견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찬성했고, 실용성은 떨어지지만, 해학성은 높이는 물건 교환이 이뤄졌다. 나는 친구에게 부자가 되라는 의미에서 ‘부자 만들기 게임’을 선물했다.리얼 현금은 줄 순 없으니 장난감을 주되, ‘이번 생에서 부자가 돼라’는 상징을 담았다. 선물을 사면서 ‘꽤 실용적인 물건이 아닐까?’ 싶어 걱정도 앞섰다. 쓸모없는 물건 교환식이지만 경제 개념도 쌓을 수 있는 유익한 물건이었다. 잘 보존만 한다면 친구의 자식까지 대대손손 쓸 수 있으리라.
선물을 받은 친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망했다”를 연신 외치면서도 예상치 못한 선물에 삽시간 웃음보가 터졌다. 쓸모없는 선물 교환식은 기대 이상으로 ‘대환장’ 파티였다. 생각지도 못한 기상천외한 별별 물건이 등장했다. 가령, 2019년 6월 19일 영수증이 등장하기도 했다. 포장한 하트 상자는 전 남자 친구가 선물한 것이라고. 하트 상자가 워낙 고급스러워서 영수증이 들어 있을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때때로 이미 고장 난 유선 이어폰은 무선 이어폰으로 변하기도 했다. 창의력 가득한 물건 교환식 현장이었다.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내년에도 또 하기로 약속했다. 쓸모에 대해선 고민하게 만들지만, 세상 유쾌한 망년회의 시작인 건 분명했다.


음식은 내가 할게. 건배사는 누가 할래?
친구 남동생이 일일 셰프를 자처했다. 우선, 한국인의 소울 푸드 격인 삼겹살로 가볍게 위장에 기름칠하기로 했다. 삼겹살은 애피타이저에 불과했다. 연이은 고기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여태껏 시켜 먹는 걸로만 알았던 탕수육이 뚝딱 완성됐다. 간장, 식초, 야채, 전분가루를 이용한 소스는 미쉐린 가이드 맛집보다 맛있었다. 여기에 스테이크, 수제 칠리새우, 짜파게티, 딸기, 마카롱, 과자까지 순차적으로 공략해나갔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쉬지 않고 ‘돼지런히’ 음식을 먹었다. 솔직히 엄마가 해준 음식보다 맛있었다. 엄마 미안. 아무쪼록 행복에 겨운 나머지 “이 집 며느리 자리 없냐고” 친구에게 묻기도. 다채로운 음식이 있는 망년회의 밤은 점점 깊어졌고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그리고 망년회엔 술이 빠질 수 없다. 술이 화수분처럼 나오는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 마셨다. 리큐르를 이용해 칵테일 조제도 했다. 건배사는 “위하여” 같은 식상한 멘트가 아닌 센스 넘치는 건배사를 건넸다. 새우살(새해에는 우리 살 빼자) 건배사를 시작으로 세상에 없는 건배사를 창조하기도 했다. 아이유(아름다운 이밤 유후) 나 오바마(오직 바라고 마음먹은 대로) 처럼 유명 인물을 활용한 이색 건배사가 더해졌다. 다들 처음엔 머리를 쥐어 잡고 볼멘소릴 했지만 막상 차례가 되니 건배사를 술술 말했다. 가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건배사가 툭 튀어나오긴 했지만, 건배사로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어른이 대공원을 품은 집
망년회가 개최되는 친구의 집은 ‘어른이 대공원’이라고 불러야겠다. 피규어 덕후인 친구 덕분에 집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집에서 접해볼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엄청난 양의 피규어가 방 안 곳곳에 가득했다. 집 주인 친구의 주요 수집 물품은 <달의 요정 세일러문>과 관련된 피규어였다. 서랍에는 오색빛깔을 내뿜는 요술봉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데, 보는 내내 감탄사가 멈추지 않았다. 친구의 집은 집이 아닌 피규어 박물관에 가까웠다고 말하고 싶다. 사진과 글로 현장을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유감이다. 또한 취미 삼아 미술을 한다던 친구의 집은 미술관이기도 했고, 보드게임방이기도 했다. 앱과 보드게임을 결합한 2019년 판 <광기의 저택>으로 다 같이 미스터리를 풀어나갔다. 어디 멀리 나가지 않아도 집에서 아주 즐거웠다. 어른이 대공원의 실 집주인 고양이, 제레미도 빼놓을 수 없다. 제레미의 애교는 뭇 많은 어른이의 마음을 녹였다. 제레미는 임시보호소에서 머물던 고양이였던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람을 아주 잘 따르는 활발한 고양이였다. 낯선 사람이 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애교를 피우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심심하면 거실로 나와선 핑크 젤리 발바닥으로 냥냥펀치를 날리던 녀석. 때론 하얀 털을 살갗에 부비며 스킨십을 시도했다. 제레미는 사람을 밀고 당길 줄 아는 영리한 고양이였다. 간식인 츄르를 주면 세상 귀여운 목소리로 우리를 유혹했고 우리 모두 애교에 넘어갔다. 미리 망년회마스엔 사람뿐만 아니라 고양이도 함께였다.


양평 두물머리에서 일출 인생샷을
망년회의 끝은 양평 두물머리에서 이뤄졌다.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의 강으로 만나 두 물이 모이는 곳이다. 망년회나 신년회의 대표 일출 명소로 소문이 자자해 방문하기로 했다. 하지만 계획이 사람 마음처럼 안 되는 법. 새벽 6시에 눈을 떠보니 몸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고백하자면 ‘졸린데 무슨 일출. 잠이나 더 잘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망년회다운 망년회를 위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두물머리로 떠나봤다.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머리는 모자를 푹 눌러써서 감췄다. 새벽 6시 30분, 렌터카에 몸을 싣고 양평 두물머리로 출발했다. 차일피일 미루다간 영영 두물머리에 가보지 못할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렌터카 대여까지 했는데 안 갈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밖을 나서자마자 치아가 덜덜 부딪칠 정도로 추위가 엄습했다. 잠깐 사이에 친구들의 두 뺨과 광대는 이미 호빵맨이 됐고, 코는 루돌프로 변해 있었다. 비로소 겨울이 왔음을 실감했다. 두물머리의 추위는 강력했지만, 그런데도 사람들이 애써 일출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평소 시끌벅적한 우리는 함구하고 자연을 감상했다. 하늘이 장작에 붙은 불씨처럼 새붉었다. 자연이란 배경 자체가 워낙 아름다워 온 사방이 포토존이었다. 그날에서야 좋은 풍경만 있다면 비싼 돈 주고 인생샷 찍지 않아도 된다는 걸 배웠다. 지평선 너머 일출이 떠오르고 오래 기억에 남을 우리의 망년회가 마무리됐다. 끝으로, 이 기사를 고마운 나의 친구들에게 바쳐본다.

글·사진 김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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