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에서 지내는 동안 많은 것들이 사라져갔다.
주택가 골목 사이에 수줍게 들어와 있던 작은 공간들이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밀려나고,
오래되어 빛바랜 노포의 창문에 '임대문의' 딱지가 붙을 때마다 나는 연남동에서 조금씩 정을 뗐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동네'의 의미가 퇴색해갈 무렵,
연남동의 깊숙한 골목에서 오래 그자리를 지키려 하는 동네 사람을 만났다.
마음 붙였던 동네 카페
2017년 6월, 자주 가던 카페 '북향'이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설마 하던 일이 벌어졌음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노트북을 들고 와 오래 작업하는 분들을 환영한다'는 북향의 메시지를 고이 받들어, 우린 회의를 하다 진전이 없으면, 노트북을 들고 북향에 갔다. 그곳에선 이상하게 아이디어가 잘 나왔고, 맘에 드는 결과물을 만들 수 있었다. 커피를 세 잔 이상 주문하면 시간이 조금 걸릴 거라며 양해를 구하는 주인장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하며, 우리 역시 천천히 내밀하고 깊은 대화들을 나누었다. 머리를 너무 굴려 배가 고파지면 감자키슈달걀, 우유에 채소, 치즈 등을 섞어 만든 파이의 일종를 시켜 먹으며 퇴근 시간을 넘기는 일도 다반사일 만큼 우리는 북향에 정을 붙였다. 주인장은 묵묵히 책을 보거나 무심하게 딴짓을 하며 손님들이 불편하지 않게 했고, 그 작은 공간을 맘껏 내어주었다.
오아시스 같았던 북향이 사라져버린 후, 우리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이동네에 마음 붙일 곳이 없는 것처럼 한탄했다. 기분 탓인지, 문을 닫은 북향을 기점으로 연남동에는 개발붐이 더 크게 불며 정겹고 말랑하던 동네가 딱딱하게 변해가는 것 같았다. 공항철도의 덕을 톡톡히 본 연남동은 관광 인프라를 갖춰갔고, 우리 회사 옆 건물에는 매일 버스가 두세 대씩 오가며 면세품을 사려는 중국인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연남동 관광 인파의 틈에서 이질감을 느낀 우리는 연남동의 더 깊숙한 곳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
붉은 벽돌의 다세대 주택이 옹기종기 모인, 연남동 끝자락과 맞닿은 그곳에서 우린 다시 안온함을 찾아갔다. 그리고 널따란 경의선 숲길을 두고서 굳이 좁은 골목을 기웃대던 우리는 차가 들어올 수 없는 길 하나를 발견하고, 그 길의 끝에서 빈티지 필름 카메라 쇼룸 '엘리카메라'를 발견했다. 2016년 8월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현관의 문구가 반가웠고, 수백 대의 빈티지 카메라가 그만큼의 세월을 품은 고가구 위에 가지런히 진열된 것이 매력적이었다.
엘리카메라는 13년째 1800~1900년대 유럽의 필름 카메라를 수집해오고 있는 강혜원 대표의 카메라 쇼룸이다. 차가 다니지 않아 조용한 이 골목이 좋아서, 붉은 장미가 한 아름 피어난 단층집이 전시장 앞을 채우는 풍경이라는 것에 끌려서, 그녀는 다른 지역의 가계약을 파기하면서까지 연남동 끝자락에 둥지를 틀었다. 유럽의 작고 한적한 동네, 그곳의 숨겨진 골목에서 발견하는 카메라 쇼룸을 상상하며 마련한 곳이라고 했다.
전시를 넘어 체험이 목적이기 떄문에 카메라를 유리 진열장 안에 넣지 않았다는 그녀. 엘리카메라의 손님들이 작은 보폭으로 움직이며 카메라를 이것저것 살펴보는 풍경은 딱 그녀가 원하던 모습이라고. 한 손님의 질문이 시작되면 10~15분은 기본으로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다른 손님들은 천천히 카메라를 만져보고 셔터도 눌러보면서 친구의 수집품을 구경하듯 편하게 둘러보면 된다. 나만 따라다니는 스태프 눈치를 보느라 편히 구경을 못 하고 나오는 가게와는 다른 정서가 이곳엔 있다. 그래서인지 엘리카메라 특유의 편안하고 따뜻한 정서에 매료된 손님들이 그녀에게 전해오는 메시지엔 치유의 감정이 깃들어 있다. 몸과 마음이 지쳐 있던 와중에 필름 카메라를 만나 삶이 즐거워졌다는 이야기, 혼자서는 뭐든 잘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필름 카메라를 든 이후로는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들은 그녀에게 동력이 된다.
그리고 얼마 전 그녀는 또 다른 동력을 얻었다. 출장차 떠났던 유럽에서 자신이 카메라 컬렉션을 한창 시작할 때 영감을 받았던 카메라 숍들이 많이 사라져버린 걸 목격하고는, 손님들과 더 많은 접점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그렇게 온라인 중심의 판매 루트를 오프라인으로 옮겨와 두 달 전, 연희동의 조용한 주택가에 2호점을 열었다. '필름 카메라 구멍가게'라 이름 붙인 그곳에서는 유명 브랜드가 아닌, 디자인이 독특하고 작동법이 남다른 기종이 더 많이 판매되고 있다. 또 내년 3월쯤이면 1950~70년대 유럽의 사진집 4~500여 권이 제3의 공간인 '엘리브러리'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필름 카메라 체험공간이자 구멍가게인 엘리카메라에서 우리는 제 공간과 수집품을 손님에게 실컷 내어주는 사람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다시 채워갈 연남동의 정서
그녀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나도 필름 카메라의 정서를 느끼고 싶어졌다. 렌즈를 여는 방식이 재밌고, 본체가 귀여운 목측식 카메라 '보이그랜더 Vito C'를 추천받고는 20여 분 동안 촬영법을 배웠다. 사람의 눈으로 초점거리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의 거리를 재야 하는 방식이라 팔을 뻗었을 때의 길이, 발의 보폭 등을 이용해야 했는데, 그렇게 거리를 확인하면서 셔터를 누르는 순간, 마치 내가 연남동 안에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팔을 뻗으면 60cm, 한 걸음 보폭은 50cm, 이를 기분으로 상정하고 연남동 골목을 거닐었다. 네 걸음 앞, 샛노란 대문 위 빨간 단풍이 핀 풍경은 2m에 초점을 맞추고 찰칵, 손을 뻗어 닿을 거리의 은행잎은 60cm에 초점을 맞추고 찰칵, 그리고 노을 지는 하늘은 무한대에 초점을 맞춰 셔터를 눌렀다. 36컷을 완성하기 위해 나는 더 천천히 걷고, 그간 돌아보지 못했던 것들을 살피며, 연남동 구서구석에 정을 붙였다. 한동안 붕 떠 있던 연남동에 대한 마음이 엘리카메라에서 다시 이어지고 있다. 셔터를 누른 후에도 카메라를 들고 화면을 잠깐 응시해달라던 그녀의 가이드를 잊지 않으며, 나는 다시 연남동을 찬찬히 들여다보려고 한다.
글 박민혜
서울 연남동의 기획 및 디자인 창작집단
'포니테일 크리에이티브'의 구성원이다.
사진 박민혜, 양경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