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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38 인터뷰

감이 있는 집

2020.11.10 | 감이 홍시가 되는 과정

1
집으로 맺은 인연

집은 인간 생활의 필수 요소입니다. 그런데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집을 구하는 일부터 난관이니, 이 얼마나 복잡한 세상입니까! 월세 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해 기숙사 합격 연락만을 기다리던 대학교 2학년 때,선뜻 공간을 내어준 선배가 생각납니다. 참으로 고마운 인연 덕분에 독립의 자유와 책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3년이 지났고, 그사이 우리 둘의 주거 환경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자주 이사를 하던 언니는 처음으로 계약을 연장하고 싶은 집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과연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요? 이은 언니의 집에 가봐야겠습니다.

2
계절감이 있는

자기소개를 부탁해.
여행 스타트업 ’마이리얼트립’의 마케터로 일하고 있는 스물여섯 살 박이은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밀도 높은 삶을 추구합니다.

블로그로 일상을 공유해서 그런가? 언니는 1년 만에 봐도 어제 본 것 같아.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오랜만에 봐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가 나도 신기해.(웃음)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재택근무를 하고 있고, 지난 학기에 복학해서 온라인 수업도 들으며 졸업을 준비하고 있어.

언니 집에 오니까 ‘이사의 고통’에 대해 써서 포스팅한 글이 생각나. 이 집을 얻을 때도 고통스러웠어?
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하거나 알맞은 공간을 찾은 뒤에도 계약을 파기당하면서 20대 초반에 상처를 많이 받았었지. 당장 이사해야 하는데 못 하니까 사람이 되게 지치더라고. 밥 먹다가 우는 일을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아서 늘 계약 기간 만료 3개월 전 무렵부터 스트레스를 엄청 받아. 그런데 이 집을 구할 때는 ‘중소기업 청년 전세자금 대출’ 덕분에 예산이 넉넉해서 여유롭게 이사 준비를 할 수 있었어. 이자율도 낮아서 사회 초년생인 내게 아주 좋은 기회였지. 그리고 집을 보던 날 맨 처음 본 이 집의 느낌이 굉장히 좋았는데, 다른 집을 봐도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서 바로 계약했어.

이 공간의 첫인상이 어땠는데?
넉넉한 수납공간과 감나무가 매력적이었어. 옵션으로 갖춰진 건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밖에 없는 집이라 너저분하고 좁아 보일 것 같았는데, 비밀 공간처럼 수납공간이 있어서 참 좋았지. 그리고 침실 창문을 열면 감나무가 손 닿는 거리에 있어. 집에 처음 왔을 때 가지에 눈이 쌓인 풍경이 너무 예쁘더라. 그때 감이 틀리지 않았어. 나무를 바라보며 힐링할 때가 많아.

짐이 아주 많은데 수납공간 덕분에 깔끔하구나. 정리가 잘된 소품 가게 같아.
내가 맥시멀리스트라 정리, 정돈에 신경 쓰는 편이야. 벽에 뭔가를 붙이거나 곳곳에 소품을 놓는 걸 아주 좋아해. 오키나와에서 사 온 모빌은 바람이 불면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참 좋아.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과 들려오는 새소리가 좋으네.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집에서 사는 게 참 좋은 것 같아. 봄이면 새싹이 돋고, 여름에는 초록빛으로 물들고, 가을이 오면 감이 열리고, 겨울이면 눈이 쌓여. 가끔 아침에 까치가 깨워주기도 해. 창틀에 새들이 자주 찾아오거든. 플랜테리어를 하고 싶을 정도로 자연이 좋아졌어.

3
맥시멀리스트의 감각적인

집에서 가장 오래 머무르는 공간이 어디야?
큰 테이블이 있는 거실이야. 한 글자라도 더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소파와 텔레비전을 포기한 건 탁월한 선택인 것 같아. 햇빛과 바람이 적당히 드는 곳에서 일하거나 공부를 하고, 친구들이 오면 수다 떨고 밥도 먹어.

불편한 공간도 있어?
조리대가 없고 개수대가 하나인 부엌은 집에서 가장 아쉬운 공간이야. 하지만 괜찮아. 선반도 없었는데, 내가 그릇을 좋아하니까 직접 설치했거든. 좁은 부엌도 맥시멀리스트를 막지 못하는구나.(웃음) 적응하기 나름인 것 같아. 무엇보다 이 공간의 핵심은 추억을 느낄 수 있는 냉장고야. 좋아하는 사진과 엽서, 여행지의 교통 카드와 마그넷을 구경할 수 있지.

추천하는 정돈 방법이 있다면?
천 가방을 좋아하는데 쌓아놓으면 손이 잘 안 가더라고. 가방걸이를 문 뒤에 설치하니까 깔끔하고 색깔이나 모양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좋아.

화장실에 갇힌 적이 있다면서?
화장실 문고리 수리를 미뤘는데 최근 외출 준비를 하다가 화장실에 갇혔어. 공간이 작아서 더 무서운 데다, 맨몸이니까 구조되어도 문제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10분 정도 어쩔 줄 모르다 심기일전해서 문을 미니까 열렸어. 되게 무서웠는데 상황이 종료되니까 너무 웃긴 거야. 문고리는 그날 바로 고쳤어. 욕실 용품을 두 개씩 놓으니까 작은 공간이 더 비좁게 느껴지는데 그래도 포기 못 해.

게으름 부리다가 그런 변을 당하다니! 반대로 반드시 지키는 루틴이 있어?
아침에 사과 먹기! 그런데 오늘은 못 먹었어. 루틴이 있는 삶이 평화롭고 건강하다고 생각하는데 매번 실패해. 그래도 주말 아침에 청소하는 계획은 무조건 지켜. 청소를 끝낸 후 샤워하고 나왔을 때 햇빛이 드는 순간이 아주 행복하거든. 안락한 내 공간에서 보내는 매 순간이 좋지만 주말 아침에 깨끗한 집을 바라볼 때가 특히 좋아.

4
나의 집과 나의 감정

집 구석구석 정성스럽게 꾸며놓았어. 집에 대한 언니의 감정이 궁금해.
이전 집들도 물론 좋았지만 이 집은 구석구석 내 손길이 닿아서 그런지 애착을 느껴. 이사 갈 때쯤 되면 항상 다른 집을 알아봤거든! 그런데 이 집은 가꾸면서 오래 살고 싶어.

집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니 표정이 무척 행복해 보여. 애착이라는 단어를 들으니까 ‘공간 장례식’이라는 말이 생각나. 삶에서 뭔가를 떠나보내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공간과 이별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많지 않은 것 같아.
애착을 가졌다면 이별하기가 더 힘들겠지. 이 집을 떠날 때 묘한 감정이 들 것 같아. 하나하나 꾸민 기억이 다 좋기 때문에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거든. 전에는 옆집, 윗집, 아랫집 모두 옵션이 동일하니까 아무리 집을 꾸며도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그런데 이 건물에 사는 사람들은 다 다르게 해놓고 살더라고. 저마다 다른 취향과 정성이 느껴졌어.

모든 것을 손수 장만한 부모님 세대와 달리 우리 세대는 풀 옵션에 익숙하잖아. 그런데 언니랑 대화하면서 풀 옵션이 과연 좋은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드네.
옵션으로 갖춰둔 게 많으면 편리하지만 그만큼 제약도 많아. 공간도 좁고,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버리지도 못하고 써야 하잖아. 여기는 딱 내가 원하는 것만 있지.

언니에게 집은 어떤 의미야?
휴식과 위로의 공간이야. 힘들 때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해. 노래 들으면서 차 마시고 일찍 잠들면 기분이 바로 나아지거든. 그런데 엄마가 그러는 거야. 내가 집에 집착한다고. 왜 그런지 생각해보니까 집에 대한 내 애착이 점점 커졌기 때문인 것 같아.

애착이 크면 좋은 거 아니야?
집에 얽힌 좋지 않은 경험이 쌓이면서 애정이 집착으로 변한 것 같아. 일단 한국에서 이사는 늘 고통스러웠고, 인도네시아에서 유학할 때도 고생을 많이 했어. 인도네시아에서는 온수로 샤워도 못 하고, 개미가 아주 많았기 때문에 한국에 가면 집에서 편하게 살아야겠다는 강박이 생겼지. 한편으로는 그런 경험이 있어서 지금 이 공간에서 만족하며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해.

독립하면서 겪은 고충이 많았구나.
내 삶을 온전히 내가 관리할 수 있다는 게 독립의 제일 좋은 점이야. 하지만 집과 관련한 모든 걸 혼자서 책임지고 관리하는 건 분명 외로운 일이라 가끔씩은 ‘이래서 같이 살아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사람 사는 곳이니까 집에 크고 작은 일들이 생기는데, 집을 혼자 가꾸는 거랑 누군가와 함께 가꾸는 건 분명 다르잖아. 혼자라서 좋지만 이면의 좋지 않은 부분도 분명히 있는 것 같아.

힘든 점이 있어도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는 이유는?
이제는 ‘자취방’이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고 ‘우리 집’, ‘내 집’이라고 표현해. 내 생활 패턴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잖아, 여기가. 최근 전주 집에 갔다가 서울 집에 돌아왔을 때 ‘아, 집에 왔다!’ 하는 느낌이 드는 거야. 이제는 여기가 내 본가 같아. 외출을 자제하는 요즘에는 집에서 휴식과 여가 생활을 모두 누릴 수 있는 데 감사해.

집에 이름을 붙인다면?
깔끔하게 ‘이은의 집’. 곳곳에 붙어 있는 사진이나 배치된 소품들은 누가 봐도 박이은 거야. 감나무, 적당한 햇빛과 식재료 이런 것 하나하나가 다 우리 집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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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익은 감정들이 무르익어 나를 유연하게 할 때

감은 초록빛에서 주홍빛으로 변하면서 더 말랑해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설익은 감정이 무르익으면 유연해집니다. 처음 감나무를 보던 날, 언니는 도대체 어떤 감정을 느낀 걸까요? 집에 얽힌 언니의 경험을 모두 알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감나무 밑에서 홍시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린 사람이 아니라는 건 분명히 알겠더군요. 숱한 시행착오 끝에 언니는 더 이상 집에 집착하지 않고, 언니 숨결이 닿아 살아 숨 쉬게 된 공간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언니와 집은 서로를 숨 쉬게 했습니다. 예쁜 소품들을 눈에 담고 내어준 차와 빵을 맛보며 제 감각들도 생생하게 깨어났습니다. ‘이은의 집’과 이은 언니가 더 아름답게 이어지는 과정을 옆에서 바라보며 참 행복했습니다.


손유희
사진 이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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