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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48 스페셜

한 시절을 품은 장소, 문구거리

2021.04.09 | 청량리 문구거리 탐방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제대로 몰라봤다. 시간이 멈춘듯한 문구점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소식을 더듬어 청량리역 근처 어느 골목을 찾아갔다. 오래된 문구점에서도 힙한 다꾸 용품을 찾을 수 있을까. 궁금증을 품고 찾아간 거리에서 의외의 수확물을 한가득 안고 돌아올 수 있었다.

* 실제 위치는 청량리동이 아니라 제기동이지만, 지명으로 더 많이 쓰이는 ‘청량리’로 표기한다.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과 제기동에는 문구거리가 있다. 창신동은 영화 <건축학개론>, 드라마 <미생>의 촬영 장소, 봉제거리와 문구거리로도 이미 유명하다. 그렇지만 ‘청량리’(제기동)*에 문구거리가 있다는 이야긴 동대문구에 살지 않았으면 절대 알지 못했을 정보였다. 잘 알려진 명소보단 ‘나만 아는’ 플레이스를 발굴하는 것이 진정한 힙스터의 길이라고 했던가. 동료를 이끌고 ‘청량리 문구거리’로 향했다. 문구거리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남은 가게는 세 곳뿐이었다. 어르신들이 좋아할 법한 보양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죽 이어진 골목에 문구점 세 곳이 띄엄띄엄 자리한 광경은 다소 어색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연 많은 사람을 앞에 둔 호사가처럼 호기심이 마구 솟구쳤다. 세 가게가 품은 각자의 사정을 궁금해하며 길목 초입의 A 문구점으로 향했다.

남은 가게는 셋, 문구거리가 품은 이야기
놀랍게도 그곳은 ‘노다지’였다. 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필통이나 노트, 안 팔리는 완구 같은 걸 상상하며 들어섰는데 첨단을 달리는 대형 프랜차이즈 문구점 뺨치게 물건이 많았다. 분명 가게가 품은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뉴트로’ 트렌드를 타고 ‘잇아이템’에 등극한 스킬자수 세트, 초등학생 때는 명절 선물세트보다 익숙했던 알록달록 문구 세트, 창문이 남아나지 않게 붙이고 떼기를 반복했던 글라스데코 같은 추억의 물건들이 눈앞에 나타나자 절로 “우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한참 물건을 헤집으며 정신을 팔다가 동료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가게 직원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여기가 문구거리였다면서요?
- 다 망하고 세 곳 남았지.
왜요?
- 아이들이 없으니까.
그럼 어떤 물건이 잘 나가요?
- 요 근처에 있는 회사에서 사무용품 사 가고 그러지.
애들은 안 와요?
- 요즘은 뭐 인터넷으로 사고 다이어리 같은 것도 학교에서 다 나눠주니까 잘 안 와.
아, 슬라임은 좋아하더라고.

정말 그 가게도, 곧이어 들른 가게에도, 그다음 가게에도 슬라임이 가득했다. MZ세대의 입맛을 저격하기 위한 노력이 온갖 종류의 슬라임에서 느껴졌다. 스팽글 슬라임, 멕시코 아보카도(색깔) 슬라임, 함박눈 슬라임… 가게 전체 공간에 슬라임이 반인 듯 그득 쌓여 있는 슬라임 더미는 확실히 어떤 문구점에서도 볼 수 없던 풍경이라 낯설게 느껴졌다. 살아남기 위해서, 세 문구점은 서로 다른 전략을 택하고 있었다. A 문구점은 주요 타깃을 회사원으로 바꾼 듯 사무용품을 대거 구비해놨고, B 문구점은 도매 장사만 했다.

화려한 모객 전략, 시간의 블랙홀에 빠지다
C 문구점은 개중 내가 아는 동네 ‘문방구’와 가장 흡사한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문간에 돼지저금통을 주렁주렁 달아놓아 화려한 인상을 자아내고 꾀돌이나 쫀드기 같은 간식으로 손님을 현혹하는 모객 전략이그랬고, 새하얀 형광등이 내리쬐는 현대식 문구점과 달리 가게 안이 살짝 어두워서 ‘먼저 찾는 사람이 임자. 하지만 과연 찾을 수 있을까.’(머릿속 상상의 내레이션이다)라고 말하는 초월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계 던전에 입성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 또 그랬다. 정신없이 다꾸용 스티커를 낚아채고 레트로 콘셉트의 미니 게임기를 살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진정 시간의 블랙홀이었다.

이날 두 곳의 문구점에서 스티커 10장과 무려 280개의 장미 스티커가 들어 있는 타투 스티커북, 일곱 개들이 반짝이펜 세트를 샀는데 쓴 돈은 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백 원, 5백 원의 쓸모는 이미 사라진 줄 알았건만. 꼬깃꼬깃 접은 천 원, 2천 원을 들고 문방구를 들락날락거렸던 어린 시절이 소환됐다. 추억에도 값을 지불해야 하는 세상이 된 것 같은데 어떤 곳엔 아직 덤이란 게 존재하는구나, 메마른 감성이 살짝 촉촉해졌다. 가게를 빠져나오는데 사지 않은 5천 원짜리 레트로 게임기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음, 아무래도 ‘텅장’으로 가는 속도를 막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글. 양수복
사진. 양수복·황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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