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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50 인터뷰

조군의 고군분투

2021.05.31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친구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지도, 그러니까, 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입니다. 제 방문을 어느새 모든 계절이 알게 되었네요.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만, 계절만은 묵묵하게 제자리를 지키는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습니다.

순환하는 네 개의 계절 중에서, 봄은 유일하게 글자에 이응(ㅇ) 자가 들어가지 않는 계절입니다. 봉,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가 있을까요? 봄, 봄, 봄… 봄이라는 지금 이 계절을 반복해 되뇌봅니다. 과도하게 많이 생각한 것 같아요. 봄이 왠지 생경하게 느껴집니다. 풀잎의 색이 이렇게 진했었나, 바다는 저렇게 짙푸르렀던가, 화단을 색색으로 칠해놓은 유능한 화가의 팔레트는 어떻게 생겼을까, 하면서요.

올해 봄처럼 제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인연이라는 것이죠. 반년 전에 만나 그때부터 거의 매일 함께하고 있는 사람. 오늘은 너무 가까이 있지도, 너무 멀리 있지도 않은 내 친구 성민이의 집에 갑니다.

우리가 영상 제작 학원에서 수강생 동기로 만난 지도 벌써 5개월이나 지났네. 나는 내가 알고 지내던 반경 밖의 사람을 만날 기회 자체가 아주 오랜만이었어.

나도 친하거나 자주 보던 사람들만 만나다 보니, 학원에 다니면서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을 만났어. 나는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먼저 다가가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아. 이를테면 공원에서 산책하다가 우연히 말을 주고받으며 동네 이웃이 되는 사람들도 있잖아, 난 못 하겠더라고.(웃음) 고향 순천을 떠나 서울에 왔고, 낯선 환경에서 알게 모르게 내 마음에 벽이 생긴 것 같아. 고맙게도 학원에서는 먼저 다가와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처럼 친해질 수 있었지.


살던 곳을 떠나는 건 큰 도전일 텐데, 그럴 만큼 꼭 이루고 싶은 것이 있었어?

어릴 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어. 그때 TV가 내게 좋은 친구가 되어줬지.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을 때, 나를 즐겁게 해준 영상에 자연스럽게 흥미가 생겼어. 그래서 영상 연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좋은 영화처럼 여운이 남는 걸 만들고 싶어. ‘저는 이런 게 좋은 것 같아요, 이런 건 어때요?’ 하며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고.

학원 수료가 이제 한 달이 채 남지 않았잖아. 늦가을에 만나 초여름이 되어 헤어질 때까지, 사계절을 함께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특히 좋아하는 계절이 있어?

하나만 골라서 특정 계절이 좋다기보다는 그냥 사계절이 있어서 좋아. 따뜻하고, 덥고, 시원하고, 춥고. 이런 것들이 사람의 감정 같은 거잖아. 우울하고, 슬프고, 기쁘고, 행복하고. 계절도 감정도 각각 장단점이 있고, 그것들이 있다는 것 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더라. 이를테면 20대 중·후반인 우리 나이를 봄이 지나 한창 여름을 보내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틀린 것 같기도 하네. 사계절은 그냥 1년을 나눈 것일 뿐, 인생 전체를 빗대기에는 너무 추상적인 것 같아. 봄에 피고, 여름에 울창하고, 가을에 지고, 겨울에 힘을 모으고, 이런 건 꽃에는 해당하지만 눈에는 안 되잖아. 눈에게 겨울은 끝이나 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일 때니까.


그 말을 들으니까 계절은 저마다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아. 지금 네게 현재진행형인 건 뭐야?

지금 당장의 계획은 없지만 목표는 생긴 것 같아. 물론 영화를 찍거나 남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상으로 보여주는 일도 하고 싶지. 하지만 언젠가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해. 나는 지금 무섭고 불안해.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이대로 이렇게 흘러가도 되는 건가, 내가 잘못된 길로 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지금 우리가 다 그러잖아. 내가 성장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칠 실력을 갖추고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방황하는 학생들에게 그리고 지금의 내게 말해주고 싶어. 지금의 너는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네 미래에는 분명 좋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고 싶어. 가르친다는 것이 그런 거잖아. 배우고 경험하면 알 수 있는데 아직 모르는 것일 뿐인 것을 알려주는 것.

계절이 돌고 도는 것, 만남과 이별, 이런 것들이 자연의 이치라고 하지만 난 헤어지는 순간에는 늘 단단하
지 못해. 학원 사람들 모두에게 정이 많이 들었는데, 한 달 뒤 수료하면 퍽 아쉬울 것 같아.

나는 대학교 때 교내 방송국에서 일했거든. 많은 일이 있었지. 졸업했지만 아직도 만나는 모임이 있어. 어떻게 다들 연락이 닿았고, 지금도 1년에 한 번씩은 만나는 것 같아. 내가 생각할 때, 지금 한 시기의 끝이 우리 관계의 끝을 의미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물론 끝이나 헤어짐은 두렵지. 하지만 함께해서 즐거웠잖아. 자주 만나는 것만큼이나 방송국 모임처럼 어쩌다 한 번 모였을 때 드는 감정도 좋아. 다들 1년 동안 잘 지냈고, 이만큼 발전해 있고, 변해 있고,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무척 재밌어. 못 본 세월만큼 할 이야기도 많고.


올해 그 사람들을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겠네. 성민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잖아. 서울에 올라와 처음으로 자취를 했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고생한 고군분투기 같은.

그렇지. 서울이라는 도시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달랐어. 출근길에 지하철 풍경을 보면 다들 엄청 바쁘고 서로 치이고 하잖아. 그런데 퇴근 시간이 지나 술집에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여유롭고 즐거워 보일 수가 없어. 휴일이나 여유로운 시간대에 밥 먹을 때나 카페에 있을 때도. 서울은 바쁘고 빡빡하게 굴러갈 줄만 알았는데, 그 속에서도 재밌게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할 때는 하고 놀 때는 놀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네게 사는 도시가 서울이어야 하고, 사는 곳이 신림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

서울은 서울이어야 했고 신림은 신림이 아니어도 됐어. 서울에 내가 원하는 기회가 많았거든. 영상 제작 학원도 많이 찾아봤는데 국비가 지원되면서, 6개월 과정의 꽉 찬 커리큘럼, 준수한 시설이나 환경 등을 충족하는 곳이었고. 사는 곳은 처음엔 학원과 가까운 당산에서 찾아봤는데 집값이 너무 비쌌어. 나중에 취업하고 서울에서 살 때를 생각해서 눈높이를 더 낮췄지. 예산에 맞고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곳을 찾아다녔고,
괜찮겠다고 생각한 곳이 신림의 이 집이었어.

근데 지금은 탈출하고 싶어.(웃음) 사정상 단기로 구하느라 방을 많이 못 봤는데, 장기 계약을 하면 더 좋은 조건의 집이 있겠지? 지금은 냉장고도 시원찮고, 세탁기도 오래됐고, 습하고… 2~3개월 전에 이런 일도 있었어. 컴퓨터에 열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발밑이 축축한 거야. 이거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돌아봤더니 바닥에 물이 흥건했어. 알고 보니 건물의 화재 스프링클러가 터졌었대. 다들 놀라 문을 열고 나와 이게 무슨 일이냐며 어리둥절해했지. 그때 처음으로 이웃과 인사하고 주변에 누가 사는지 알게 됐어.(웃음) 2~3일 동안 단수가 되어 씻지도 못했고. 그러잖아도 집이 난장판인데, 침대와 컴퓨터는 무사했지만 곳곳에 곰팡이가 무럭무럭 자랐지. 겨울에는 한 번씩 보일러가 얼고, 가끔 터지기도 해서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어. 좋지 않은 일을 생각하면 끝이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좋은 곳을 찾고 싶어.


나도 막연하게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역시 현실은 녹록지 않구나.

맞아. 나도 자취하기 전에는 가족의 간섭을 받을 일이 없고, 친구들을 자주 불러서 놀 수 있어 좋겠다고 상상했었는데, 역시 가족의 품이 제일 좋은 것 같아.(웃음) 내가 요리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주방 환경도 한정적이니 가족들이랑 집밥 먹던 때도 그립고, 서울에는 순천보다 상대적으로 친구도 적으니까 마음 편히 부를 사람도 없고. 그리고 직접 장을 보면서 물가를 체감하고 경제관념이 더 생겼어. 집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채소가 어느 때 비싸지고, 달걀이 언제 비싸지는지 등을 체감하면서. 나는 과일을 좋아하는데, 집에서는 가족들과 늘 나눠 먹던 과일이 혼자 사니 참 비싸게 느껴지더라.

그래도 집에 별거 없다고 하더니, 침대 머리맡에 휴대폰을 고정할 수 있는 거치대도 있고, 컴퓨터에 모니터도 두 대나 있고, 난 무척 부러운데.

맞아. 이 방의 첫인상이 ‘와, 정말 좁다!’였거든. 근데 살아보니 사는 데 지장은 없더라. 좁은 만큼 안락하고 편하다고 해야 하나? 순천에서는 가족이 같이 사니까 넓고 청소할 것도 많았는데, 혼자 사니까 관리하기 쉽고 더 편한 점도 있고. 창문도 이 건물에서는 제일 커.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어쩌면 사소하지만 충분한 나만의 행복도 찾았어. 내가 이 집에서 보내는 하루 중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자 자기 전에 습관처럼 꼭 하는 일이 있거든. 씻고 침대에 누워서 불을 끈 뒤 그날 올라온 웹툰을 싹 다 보고 자.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만의 의식 같은 거지. 다 읽고 잠이 안 와도, 오늘 하루가 끝났다는 느낌을 받아. 또 내 생일이 8월 16일인데, 그래서 시계가 8시 16분일 때 시간을 확인하는 것을 좋아해. 하루에 두 번 볼 수 있지. 그래서 나는 시간을 24시간제로 설정해두지 않아.(웃음)

이 집의 계약 기간이 곧 끝난다고 들었어. 한 번 경험했으니 다음엔 더 잘할 수 있겠다든지, 언젠가는 이런 집에 살고 싶다든지, 이런 계획이나 생각이 있어?

첫 자취집이라 그런지, 언제가 되었든 이 집이 참 많이 생각날 것 같아. 이 집의 계약이 끝나기 전에 새로운 집을 보러 다니겠지. 그곳이 지금보다 더 나을지 아쉬울지 모르겠지만, 새로 이사 간 집에서도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거나, 이 집에서 있었던 일과 겹쳐지는 일이 생기면 이 집이 많이 생각날 것 같아.

다음엔 분리형 원룸에서 살고 싶어. 왜냐하면 지금 같은 형태의 원룸에서는 요리할 때 방에 냄새가 많이 배더라고. 창문을 열고 환풍기를 켜도 그래. 그리고 개별난방이 되는 곳이면 좋겠어. 또 창이 넓고 햇빛이 잘 드는 곳을 찾고 싶어. 나중에는 마당에 연못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어. 그때가 되면 반려동물도 키우고 싶고. 좋은 사람과 함께 살면 행복할 것 같아. 그리고 누군가 놀러 왔을 때 내 집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고 느끼면 좋겠어.


글. 조은식
소개말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

사진. 이규연
바쁜 일상 속 반짝이는 찰나를 담는 사진작가.
편안하고 차분한 사진을 좋아하고, 시선이 오랫동안 머무르는 사진을 찍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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