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매매 여성, 폭력 피해 여성의 자립을 지원하는 사회복지법인 윙의 최정은 대표는‘뺄셈의 복지’라는 단어를 쓴다. 단 한 명의 여성이라도 윙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공동체를 경험해 세상을 달리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법인의 성장보다 의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정은 대표는 윙을 찾아오는 ‘친구들’*이 어떻게 하면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 두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고민했던 시간이 ‘싸움’인 동시에 신나고 즐거웠다고 소회했다. ‘윙의 친구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윙을 지탱하는 척추 같은 존재, 최 대표를 윙의 소셜 다이닝 공간인 비덕살롱에서 만났다. (* 윙에서는 피해 여성들을 '윙의 친구들'이라 부른다.)
- 먼저 사회복지법인 윙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려요.
성매매 피해 여성들을 위한 시설에 여러 종류가 있는데요. 상담소와 쉼터가 있고 윙은 자활지원센터라고 해서 출퇴근식으로 오는 곳이에요. 센터에서 일과 관련된 것들을 교육받고 윙에서 운영하는 매장이나 외부 일터에서 일을 하시게 돼요. 자활지원센터 ‘넝쿨’과 소셜 다이닝 ‘비덕살롱’, 카페 ‘곁애’를 운영하고 있어요.
- 코로나19로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이 큰데, 윙에서 운영하는 비덕살롱과 카페 곁애의 운영 현황은 어떤가요?
사회복지법인에서 운영하는 사업장이다 보니 소규모 자영업자 지원에서 제외가 됐어요. 지원금을 받지 못해서 어려움이 많았죠. 비덕살롱은 저녁에 문을 닫고 점심 장사만 해도 되긴 하는데, 이참에 정비를 하려고 닫았어요. 카페는 코로나19가 심할 때 영업을 안 했더니 회복이 안 되더라고요. 회복에 시간이 많이 걸려서 손해가 나더라도 열어놓기로 했어요.
아쉬운 건 비덕살롱의 케이터링 사업이에요. 몸은 힘들어도 단기간에 수익이 나는 사업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윙의 친구들이 현장에 나가서 스태프로 일하면서 굉장히 좋아했거든요. NGO 단체의 행사에 주로 들어가니까 윙과 윙의 친구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요. 눈빛만 봐도 느껴지잖아요. 격려와 응원을 많이 받았죠. 케이터링 하러 갔다 오면 되게 좋아했는데 못 하게 돼서 아쉬워요.
모자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최정은 대표. (아랫줄 좌측 두 번째)
- 윙은 대표님의 할머니 故 백수남 원장님이 1953년 미혼모를 돌보려 설립하신 모자원이 시초가 되었다고요. 어떻게 삼대째 사업을 이어오시게 되었나요?
어떻게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요.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어요.(웃음) 이 공간은 어렸을 때부터 놀러 오는 곳이었어요. 언니들도 있고 크리스마스 파티도 하고 김장도 하고 행사가 많잖아요. 늘 놀러 다니는 곳이었는데 1997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법인의 대표를 맡으면서 저도 실무를 하러 들어왔어요. 처음엔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없어서 경리도 하고 잡무를 다 하다가 대학원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자격증을 땄죠.
- 그 전에는 의상 디자인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대학은 공예과를 나왔거든요. 디자인 관련 회사에서 일을 했고 아버지가 의류 제조 회사를 하셔서 거기서도 일했어요. 아버지는 할머니의 이 법인을 본인이 물려받아서 하겠다는 준비를 하셨고, 저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아버지가 제안하셨죠. 하시던 의류 제조업을 정리하면서 여기를 같이 해보자고요. 그렇게 여기에 왔는데, 이전에 제가 알고 접했던 세상과 다른 세상이 펼쳐진 거예요. 여기에 찾아오는 여성들을 마주하면서 저도 하나씩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어요.
- 법인을 처음 맡으셨을 때 윙의 모습은 어땠어요?
성매매 피해 여성뿐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이 다 왔어요. 가정폭력을 겪은 여성도, 그때는 부랑인이라고 했던 홈리스 여성도, 탈가정 청소년도 있었어요. 당시에는 주거의 개념도 지금보다 열악했어요. 원룸, 찜질방, 고시원도 적었고 나가면 실제로 있을 데가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주거를 중심으로 숙식을 제공하면서 여성들에게 기술을 가르친다거나 취업을 연결하고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을 했어요. 베이스가 쉼터였죠. 먹고 자는 게 가장 중요하고 시급했어요.
- 주로 쉼터와 보호시설로 운영하다가 자활지원센터로 활동 중심을 옮기셨는데요.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에는 어떤 고민이 있었나요?
쉼터를 하면서도 먹고 자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프로그램을 했어요. 그러면서 보니까 쉼터라는 공간이 자립하는 여성들을 안주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고민이 드는 거예요. 다음 단계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려고 하기보다는 안주하게 될까 싶어서 쉼터 공간에서 다양한 시도를 했어요. 몸의 관성과의 싸움이었어요. 그동안 살아왔던 몸의 흔적들이 있잖아요. 쉼터에서 그걸 뛰어넘으려고 다양한 시도를 해도 안 되고 좌절하다가 결론을 내렸어요. 쉼터라는 체제는 바꿔보겠다고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걸요. 왜냐면 이 여성들이 이 쉼터가 맘에 안 들면 다른 쉼터로 가면 되거든요. 쉼터의 존재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쉼터에서의 생활을 조금 다르게 해보자는 건데 그게 정말 힘들었고, 쉼터 말고 조금 더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일을 중심으로 하는 센터를 만들어보자 결론을 내렸죠. 그때부터 쉼터의 규모를 조금씩 줄여가면서 자활지원센터에 주력하게 됐어요.
- 성매매 피해 여성도 사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가게도 내셨다고요.
막 성매매 방지법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였어요. 이 여성들이 사회구조의 피해자이긴 하지만 피해 위주로만 묘사되는 틀을 깨고 싶었고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무조건 사장을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상징 같은 거죠. 왜냐면 그동안 결과물이 없다, 성공 사례가 없다는 말만 들었으니까요.
처음 오픈한 게 피부관리숍이었어요. 바로 이 공간(비덕살롱)에서 오픈했는데 사람들이 정말 많이 축하해주고 도와줬어요. 그때 여성부(현 여성가족부) 국장님이 오셔서 우셨어요. 항상 돈만 투입되고 나오는 건 없다고 주변에서 시달렸는데 눈으로 보이는 성과는 처음이라면서요.(웃음) 그렇게 2년은 한 거 같아요. 그 친구가 굉장히 열심히 잘했는데 어느 날 결혼을 하겠다고 했어요. 결혼해도 좋고 일만 계속하자고 설득했는데 임신을 했어요. 아이도 내가 키워줄 테니까 계속하자고 했는데 떠나면서 숍을 정리하게 됐어요.
- 아쉬움이 크셨겠네요.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굉장히 변수가 많은 일이에요. 가족 중에 누가 아프다고 하면 일 그만두고 가서 도와줘야 하고 갖은 변수가 많은데 그때마다 같은 일을 겪으면 너무 힘들겠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을 만들어보자고 결심했죠. 모두가 협력하는 법인 차원에서 운영할 수 있는 가게를 만들어보자고 하면서 카페를 시작하게 됐어요.
- 일하는 공간이라는 시스템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으셨어요?
관성과의 싸움이었어요. 우리가 학교에 공부만 하려고 가는 게 아니잖아요. 학교에 정기적으로 간다는 약속을 지키고 그 와중에 친구도 만나고 사회에서 배워야 하는 여러 가지를 배우는데 우리의 친구들은 그럴 시간이 없었던 거예요. 어떤 곳에 소속되어서 일을 하는 훈련이 안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더 힘들어했죠. 출퇴근 시간부터 쉬는 시간,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약속들을 다 가르쳤어요. 엄청난 불화와 싸움의 시작이었죠.
- 맞춰나가는 과정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을 텐데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그때는 젊을 때라 따끔하게 말했어요. 지금은 안 그렇지만요.(웃음) 튕겨져나가고 반발을 하고 제 욕을 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그 친구들한테 연민을 가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컸어요. 연민에서 동정이 나오고 시혜가 싹트니까요. 똑같은 인격체로 대하려고 했죠. 그러니까 해야 할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거예요. 만약 제가 그 친구들을 불쌍하다는 태도로 마주하면 좋은 소리만 할 수밖에 없거든요. 쉼터를 정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그거였어요. 과연 복지라는 게 이렇게 다 받아주고 좋은 말만 하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본인한테 도움이 될까 자괴감이 들었죠.
- 윙의 윤리 세 가지가 인상적인데요. ‘약속을 잘 지킨다’, ‘핑계 대지 않는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라는 세 가지 원칙을 만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의 공동체에서 같이 살아갈 때 제일 필요한 게 뭘까 생각했는데 그 세 가지더라고요. 매주 수요일에 인문학 공부를 하고 금요일에는 등산을 다녔어요. 그때마다 늘 약속이 안 지켜지고 핑계가 들리는데 일단은 핑계 대지 말고 그냥 늦었으면 조용히 들어가자고 했어요. 약속을 지키는 건 기본인데 시간 약속부터 인문학 공부할 때 리포트 작성하기, 교육받을 때 휴대폰 꺼놓기 같은 사소한 것들을 지키는 게 어려웠어요. 마지막으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이 안에서 생기는 불화가 다 거기서 시작되더라고요. 누가 이 자리에 앉았는데 안 치우고 갔다고 싸우게 되는 거죠. 그래서 자기가 쓴 공간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바로바로 치우자고 원칙을 정했어요. 이 문화를 여기에 정착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피를 많이 흘렸어요.(웃음)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 기자들이 물어봐요. 이 여성들이 어떤 모습으로 사회에 나갔으면 좋겠느냐 이런 질문들을 많이 하는데요. 제가 말하는 건 중요하지 않고 가장 기본적인 것만 지키고 살면 되겠더라고요. 건물 마당에 ‘안녕하세요,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적혀 있어요. 사람을 보면 반갑게 먼저 인사하는 거, 자기가 한 실수에 대해서는 사과하는 거, 누구한테 호의를 받았을 때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하는 세 가지가 너무 절실하더라고요. 여기서 자격증을 몇 개 따고 검정고시를 통과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이 세 마디를 할 수 있게 되고 나간다면 보람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 기본적인 습관을 만드는 게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자격증이 있다고 삶이 크게 바뀌는 게 아니고요. 여기서 월급을 150만 원 받다가 나가서 300만 원 받는다고 해도 삶은 안 바뀌고 더 누추해지기도 했어요. 더 벌기 위해서 아침 일찍 갔다가 저녁 늦게 오고 맨날 아무거나 먹게 되니까 피폐해지는 거죠. 삶을 바꾼다는 게 가장 중요한 화두였어요. 어느 날 우연히 취약계층을 위한 인문학 과정인 ‘희망의 인문학’을 알게 됐어요. 거기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빵보다 장미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삶의 파도 앞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가슴속의 장미 한 송이가 중요하다는 뜻이었어요. 그 말이 우리를 위한 얘기라고 생각해서 인문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꼭 지식적인 걸 배우려고 했다기보다 몸을 바꾸기 위해서도 필요했어요. 정해진 시간에 가서 수업을 듣고 숙제를 하고 약속을 지키고 그렇게 하루하루 일상을 살다 보면 그게 쌓여서 내 몸의 습관이 되는 거거든요. 일상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였죠. 소소하게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주어진 시간에 정성스럽게 밥을 해서 자기를 위한 밥상을 차리고 동네 사람들과 교제를 하고 사람들과 취미생활을 갖는 거요.
- 탈성매매 여성과 가정폭력 피해 여성, 탈가정 청소년 등 취약한 ‘여성’을 지원하는 활동에서의 어려움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복지 중에서도 여성 복지가 마이너 중에서도 마이너하다고 생각해요. 또 탈성매매 여성을 위한 일을 한다는 건 더 마이너하고요. 저부터도 탈성매매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상관없는데 배타적인 시선에서 오는 어려움이 많았죠. 반면에 따뜻한 관심도 많이 받아서 힘들었다고만 할 수 없지만요. 자원이 없는 취약한 여성들이 성산업의 경로를 따라갈 수밖에 없게 만든 건 사회잖아요.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 윙이 대표님의 삶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커서 힘든 점은 없었어요?
젊을 땐 힘든지도 모르고 신나게 했어요. 아이들한테도 엄마가 정성을 쏟는 일이 있다는 게 플러스면 플러스지, 마이너스는 아닌 것 같아요. 저도 이 안에서 새롭게 배우는 게 너무 좋았거든요. 인문학 수업을 하면 제일 맨 앞자리에 앉아서 배우고요. 또 윙의 친구들과 제가 몰랐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배우는 게 너무 좋았어요. 일의 사적, 공적 구분이 의미가 없더라고요. 24시간 윙을 생각하고, 야유회를 가면 아이들도 데려가고 그랬으니까요.(웃음) 또 할머니, 아버지로부터 이어져오는 일이니까 그런 생각이 더 강했을지도 모르죠. 싫다고 그만둘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 대표님에 이어서 자녀분들이 윙을 이끌어갈 생각도 하시나요? 윙의 다음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요.
삼대가 했으면 많이 한 것 같아요.(웃음) 어떻게 하면 제가 빠지고 다음 세대로 넘어갈 수 있을지 갈무리를 고민하고 있어요. 다른 모습이 되어도 더 많은 사람이 이용하게끔 해야겠죠.
글. 양수복 | 사진. 김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