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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65 에세이

다정한 빛으로 채워진 공간

2021.12.24 | 사는 곳이 그 사람을 말한다는 것

‘사는 곳이 그 사람을 말합니다.’ 아파트 광고 문구로 쓰인 문장이었다. 씁쓸했다.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는 곳에 이토록 사치스럽고 적나라한 슬로건이라니. 하필 아파트 분양 광고 문구로 쓰인 것이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그 문장을 기억했다. 잘 생각해보자. 속물적이고 사치스러우나 그 관점을 뺀다면 제법, 꽤, 많이 근사하다.

[Unsplash]

나는 올가을 내 나이보다 오래된 빌라를 계약했다. 요즘은 좀처럼 보기 힘든 붉은 벽돌로 지어진 외관에 추운 날이면 각 집마다 돌아가는 가스보일러에 하얀 연기가 보인다. 이런 모습이 왠지 정겹기까지 하다. 사는 곳이 그 사람을 말한다는 문장은 이런 풍경 속에 사는 사람을 어떻게 설명할까를 상상하며 내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거실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비싼 술을 맛있게 마시는 다이닝룸으로 만들고, 방은 침실 겸 서재로 은은한 조명이 감돌게 꾸몄다.

난잡하게 쌓인 책은 안타깝게도 인테리어가 아니다. 아직 마음에 드는 책장을 만나지 못해서 찾을 때까지만 두어야지 하던 게 석 달째다. 그래도 나름 분위기가 있어 일단은 두고 있다.

가장 애정이 깃든 곳은 침실 겸 서재다. 소파와 조명을 붙여놓으면서 생각하는 인간이 되겠다고 결심했거든. 조명 아래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으면 은근히 공간을 채운 빛이 그동안 놓친 마음을 부른다. 부끄럽고 차가운 마음부터 따뜻하고 위로가 된 마음까지 놓친 감각을 다정히 불러온다. 엉엉 울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심해로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가끔은 몽글하게 피어오르는 기분에 어쩐지 지나간 인연을 붙잡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 덕에 몇 년을 연락하지 않던 이들과 연락이 닿아 잘 지내게 된 경우도 있다.

아침 일찍 눈이 떠진 날은 재빨리 소파로 몸을 옮겨 내가 먼저 생각을 부른다. 점심으로 짜파게티에 갓김치를 올려 먹을지 파김치를 올려 먹을지 고민하고 잠들기 직전에 와인을 마실지 위스키를 마실지 고민한다. 그래,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하며 오랜 시간을 보낸다.

사는 곳이 나를 말한다는 것, 어떤 의미에선 쉽고 편한 말이다. 단지 사는 곳이 나를 말해준다면 나는 다정한 조명이 있는 공간만으로 다정한 인간일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나는 다정한 인간으로 불리진 않는다. 농담으로라도 다정한 인간일 수 없다. ‘팩폭’을 즐겨 하는 웃긴 인간은 될 수 있겠지만.

사는 곳이 나를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는 곳으로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있다면 나를 말하기란 얼마나 간단할까. 이렇게 적다 보니 씁쓸했던 분양 슬로건은 더 이상 씁쓸하지 않다. 사는 곳에 맞추어 생각하는 인간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 더 많은 사진과 기사 전문은 매거진 '빅이슈'265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 | 사진.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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