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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69 에세이

서울에서 살아남은 1930년대 맨홀 뚜껑

2022.02.17

[펜타그램 Overlooked 포스터]


오래된 것을 개발의 대상으로만 보는 도시에서 용케 살아남은 존재들이 있다. 바닥에 딱 붙어 90여 년의 세월을 버텨온 맨홀 뚜껑에 관한 이야기다.

도처에 널려 있지만 결코 주목받지 못하는 것들. 그중에 맨홀이 있다. 지상에서 지하로 사람이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든 통로라 하여 붙여진 이름, 맨홀(Manhole). 10분만 시선을 내린 채 거리를 걸어보자, 금세 수십 개의 맨홀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수관, 가스관, 수도관부터 각종 전기, 통신 케이블까지 지하에는 도시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무수한 실핏줄들이 흐르고 있다. 맨홀 뚜껑은 그 실핏줄에 가닿을 수 있는 비밀의 문인 셈. 실핏줄이 터지지 않았는지, 노화되어 막히지는 않았는지 점검, 관리하기 위해 사람들은 맨홀 뚜껑을 열고 지하로 향한다.
그러니까 맨홀 뚜껑은 근대화된 도시의 상징이다. 도시를 지속하기 위한 각종 인프라가 이 아래 매립되어 있다는 동그란 표식. 비나 눈 등에도 부식이 적어야 하고, 주로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 위에 설치하기 때문에 소재는 주철로 만든다. 내구성이 좋아 오랜 세월을 버티는 덕분에 뜻밖의 역사적 단서가 되기도 한다.

1930년대 맨홀 뚜껑을 찾아서
일제강점기 경성부 맨홀 뚜껑이 여전히 서울 곳곳에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별도의 관리나 보존 계획 없이 거리에 다른 맨홀 뚜껑들처럼 툭 박혀 있다니 좀 의아했다. 그 당시 나는 서울에 남아 있는 근대 유산을 직접 경험하는 답사에 한창 빠져 있었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원형을 알 수 있는 근대를 제대로 대면해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겪은 근현대사가 너무도 극단적이고 치열했기 때문일까.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유산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누가 봐도 근래에 지어진 듯한 현대식 건물 앞에 조그맣게 ‘옛 ~터’라는 푯말을 보는 것은 참으로 김빠지고 시시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 형태를 그대로 간직한 맨홀 뚜껑이 여전히 건재하다니. 일제강점기를 연구하는 학자분이 알려준 몇 개의 주소를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맨홀 뚜껑의 좌표들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 무심코 지나쳤던 길거리의 맨홀 뚜껑들을 자세히 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서울에 감춰진 여러 겹의 레이어를 보다.
종로구 신문로 2가에서 처음 만난 1930년대 맨홀 뚜껑에는 지금의 한국전력 역할을 했던 ‘경성전기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 이하 경성전기)’ 로고가 선연히 새겨져 있다. 경성을 상징하는 ‘서울 경’ 자에 벚꽃처럼 보이는 모양의 패턴이 글자를 감싸고 있는 디자인이다. 부식이나 마모도 적어 모르고 보면 현대에 만들어진 맨홀 뚜껑으로 착각할 정도. 맨홀 뚜껑에는 대부분 관리 주체를 표기한다. 맨홀 뚜껑에서 서울시 휘장의 변천사를 발견할 수 있고 단기 연도가 새겨져 있거나 두루넷 등과 같이 지금은 합병되어 사라지고 없는 민간 기업 로고가 적힌 맨홀 뚜껑도 볼 수 있다. 경성전기의 로고가 새겨진 걸 보면 그 아래로 전기선이 매립되었을 터였다. 신문로 2가 지역은 1930년대 조선총독부 전매청 관사지이자 대표적인 일본인 선호 거주지였다. 녹음에 둘러싸여 조용했을 뿐 아니라 일본인 관료 자녀들을 위한 명문 경성중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위층의 일본인들을 위해 전기선 매립은 필수적이었을 터. 1887년 경복궁 건청궁 안뜰에서 최초로 백열등을 밝힌 후 고종은 1898년 한성전기주식회사를 설립해 전기 발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서구 열강이 개입하고, 일본의 식민 지배 도구로 회사가 넘어가는 과정에서 전기료는 높아져만 갔고 전기의 대중화는 더욱 요원해졌다. 경성의 전기, 전차, 가스를 독점 공급하는 경성전기는 엄밀히 말해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을 위해 존재하는 기업이었다. 경성전기의 휘장이 새겨진 맨홀 뚜껑 너머로 서울에 감춰진 여러 겹의 레이어가 보인다. 오리지널리티의 힘일까. 이렇게 실물로 남은 역사의 단서들은 존재 자체만으로 하나의 맥락을 형성해버린다. 이외에도 남영동, 경운동, 통인동, 충무로, 당시에는 공업지구로 막 개발이 시작되었던 영등포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기의 오래된 맨홀 뚜껑들이 지금도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서울의 오래된 풍경을 상상하게 만드는 소중한 단서들이다.

[Raubdruckerin 작업 과정]


도시의 지문이 된 전 세계 맨홀 뚜껑
서울에만 18,526개의 전기 관련 맨홀을 비롯해 총 5만 5천여 개의 맨홀이 있다. 2017년 서울시 통계이니 지금은 더 늘었을 수도 있겠다. 상수도, 하수도, 통신, 전기 등 약 일곱 가지 기능을 하는 맨홀들은 도시의 인프라를 유지, 관리, 보수하는 데 일조한다. 둥근 프레임 안에 다양한 패턴과 타이포그래피가 양으로 음으로 새겨져 있어서일까. 2000년대 들어서는 디자인 오브제로 맨홀 뚜껑을 바라보는 움직임도 국내외에서 발견된다. 독일의 엠마 프랑스라는 디자이너는 라웁드룩케린(Raubdruckerin, 해적 프린트)이라는 그룹을 결성해 전 세계의 맨홀 뚜껑 디자인을 조명한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독특한 디자인의 맨홀 뚜껑을 찾아 무지 티셔츠, 가방 등의 직물이나 종이에 그 패턴을 입히는 것. 실제 도시의 맨홀 뚜껑에 페인트를 칠한 후 현장에서 손으로 찍어낸다고 하니 도시 전체를 작업실 삼는 셈이다. 맨홀 뚜껑은 도시의 지문 같아서 지역에 따라 고유하고 독창적인 패턴을 가진다. 2006년 첫 실험 이후 지금까지도 프로젝트가 이어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런던, 뉴욕, 베를린 등에 오피스를 두고 있는 글로벌 디자인 회사 펜타그램(www.pentagram.com)은 런던의 맨홀 뚜껑을 주목했다. 이 도시는 전기, 물, 가스뿐 아니라 한때 런던을 산업혁명으로 몰아넣은 석탄 저장고로서 지하 구획들을 사용해왔다. 펜타그램의 마리나 윌러(Marina Willer)는 도시의 아름다움이 예술이나 웅장한 건축물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다는 데에서 이 프로젝트의 의의를 밝혔다. 22개의 런던 거리 맨홀 뚜껑을 탁본해 A1 사이즈의 책자 ‘Overlooked(제목도 ‘간과’라니!)’를 제작했고 한정판 포스터로 전시도 진행했다. 화려한 네온 컬러로 프린팅한 도시의 지문들은 역사적, 심미적, 기능적 요소들을 모두 품고 있어 많은 상상을 하게 만든다.
서울의 맨홀을 일일이 발로 걸으며 기록한 책도 있다. 서울시의 맨홀 지도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정진 씨가 서울 25개 구를 직접 돌아다니며 2천 400여 개에 이르는 맨홀을 담은 책이다. 인사동에 있는 매듭 문양의 맨홀, 88 서울올림픽의 흔적이 남아 있는 맨홀 등 다양한 서울의 맨홀 뚜껑을 볼 수 있는 사적이자 공적인 사료다. 서울에 남아 있는 경성부의 맨홀을 구글 지도에 맵핑하는 프로젝트도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오래된 것들, 일상적인 것들, 내 주변의 것들로 향하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문제의식이 생긴다. 개인이 아닌 지자체나 정부가 아카이빙의 주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무관심으로 인한 훼손이나 개발 등 여러 이유로 사라지기 전에 공적인 시스템 하에서 제대로 기록, 보존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이미 경험한 바 있지 않던가. 중간중간 끊긴 역사의 맥락은 현재뿐 아니라 다가올 미래를 엉성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 글은 아주 오래된 맨홀 뚜껑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변화해야 살아남는다고 말하는 도시에서 오래된 것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은 각별하다. 오래된 것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상상하다 보면 현재의 숨겨진 맥락을 찾을 수 있다. 도시의 과거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땅 위에 있다. 도처에 널려 있지만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 지금 당신이 딛고 서 있는 그 발아래 100여 년 전의 맨홀 뚜껑이 있을지도 모른다.

※ 더 많은 사진과 기사 전문은 매거진 '빅이슈'269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 김선미 | 사진. 김선미, 펜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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