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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69 컬쳐

찾던 것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모양의 겨울

2022.02.22 | 인천

심리학에 ‘콘크리트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보다 정확한 용어는 ‘초두효과(Primacy effect)’. 누군가를 처음 만난 순간 내가 그에 대해 갖게 되는 이미지, 쉽게 말해 ‘첫인상이 미치는 강력한 효과’를 뜻하는 단어다. 한번 고착된 인상은 마치 ‘콘크리트’처럼 강고하고 단단해서 이후 어떤 새로운 정보가 업데이트돼도 그 첫 느낌을 뒤집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한다.
이 법칙은 어쩌면 대인 관계를 넘어 여행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싶다. 식당, 카페 같은 소규모 공간부터 넓게는 도시, 국가 등 낯선 영역에 처음 발을 딛는 순간,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의 운명이 어느 정도 결정돼버리는 경험을, 나는 살아오며 여러 번 해봤기 때문이다.
지난주 인천에 다녀왔다.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에게 한국의 첫인상을 안기는 도시. 한국인인 나에게 인천은 그저 ‘인천공항’ 그 자체였다. 공항에 갔던 날을 빼면 송도 센트럴파크에 두 번, 차이나타운에 가서 짜장면 한 그릇을 먹고 온 게 전부라 인천에 가봤지만 인천에 가봤다고 하기 민망했다.
(차이나타운은 ‘차이나타운’이니까 제외하고) 어쨌든 내가 갖고 있던 인천의 이미지는, 어쩐지 이질감이 들 정도로 세련되고 매끄러운 도시였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뭐랄까, 약간 지나치게 젠틀해서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달까. 딱히 나쁜 인상이 아니기에 굳이 엎어버릴 필요까진 없지만, 언젠가 인천에 제대로 놀러 가게 되면 그동안 봐온 각 잡힌 풍경 말고 조금 미련하고 친근한 면을 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렇게 모범 시민의 감춰진 이중생활을 파헤치는 기분으로 껄렁하게, 인천을 찾았다.


그래도 여전히 해피 엔딩을 꿈꾸는 동네
송월동 동화마을
인천광역시 중구 송월동3가

차이나타운과 이마를 맞대고 있는 송월동 동화마을은 19세기 말 개항기 무렵 부유한 외국인이 모여 사는 부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호시절이 저물고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고령의 소외계층만 남게 됐다, 이후 오랜 시간 시들어가다가 2013년 주거 환경 개선의 일환으로 ‘피터 팬’, ‘빨간 모자’, ‘백설공주’ 등 동화 속 그림을 담벼락에 그려놓기 시작하면서 ‘송월동 동화마을’이 탄생하게 됐다.
위키백과에서는 이 마을에 대해 ‘벽화마을 성공 사례 중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른 여러 기사나 방문 후기에도 ‘인생샷 찍기 좋은 곳’. ‘데이트하기 좋은 곳’ 등의 타이틀을 달고 소개되고 있는데,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난 1월에 다녀온 나는 흔쾌히 동의하기 어렵다.
한때 수많은 이들의 걸음을 당기는 중력을 가졌다가 어느 순간 쇠락하여 외면당하는 곳에는 유기된 마음들이 엉킨 황량함이 있다. 애초부터 손을 타지 않은 평범하고 무료한 동네에선 자라지 않는 짙은 적막과 뾰족한 회의감. 안타깝지만 송월동 동화마을(이하 동화마을)은 나에게 그런 암울한 사례 중 하나로 여겨졌다.
동화마을에 대한 첫인상은 한마디로 ‘썰렁한 농담’ 같았다. 아주 형편없는 곳이라곤 할 수 없다. 분명 시선을 묶어두는 훌륭한 그림과 사진 찍기 좋은 포토존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다소 어수선하고 조악한 마을의 꾸밈새, 소홀한 관리와 부주의로 훼손된 작품들을 비켜서는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또한 디즈니 캐릭터들이 그려진 일부 벽화 및 조형물을 보면서 과연 ‘디즈니’와 저작권 협의가 되었을지 불쑥 의구심부터 들었다(현재 알려진 바로는 저작권 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속엣말을 좀 더 꺼내면 이번 인천 여행기에서 동화마을에 대한 부분을 아예 빼버릴까 고민될 정도였다. 월미도, 을왕리, 소래포구 등 인천의 명소는 얼마든지 많으니까. 하지만 이런 실망과 아쉬움 또한 내가 인천이라는 도시에서 얻은 콘크리트 블록이고 이런 게 바로 여행이니까, 굳이 못 본 척 치우거나 억지로 감추지 않기로 했다.
‘꿈보다 해몽’ 같지만 온갖 이야기들이 맥락 없이 들어찬 이 동화마을에서 포장되지 않은 ‘진짜 동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이의 마음’이라는 게 단순히 알록달록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는 걸 지독하게 경험하는 중(네 살 된 아들이 있습니다…)이라 그런가. 아무튼 동화마을 윗길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의 전경도, 길고 곧은 골목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큰길로 이어져 마치 거대한 야외 갤러리 같았던 마을의 골격도 꽤 인상적이었고 또 아까웠다.
재주꾼들이 제대로 두 팔 걷고 나서서 조각난 꿈들을 차곡차곡 가지런히 모으면, 송월동 동화마을에 다시 한번 동화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 같은 바람을 어른답게 구시렁구시렁 남겨본다.


어제를 딛고, 사람과 예술을 잇는 복합문화공간
인천아트플랫폼
인천 중구 제물량로218번길 3

우리나라 땅에 중국과 일본 등에서 온 이방인들이 제멋대로 선을 그어놓고 으르렁거리며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과 취향대로 무례하게 터전 넓히더니, 떠날 때 차마 뽑아갈 수 없었는지 정체불명의 건물들을 잔뜩 남겼다. 영영 아물지 않을 서글픈 역사의 흔적이지만 인천 사람들은 서둘러 무너뜨리지 않고, 얼렁뚱땅 재건하지도 않고, 무심하게, 한참 내버려두었다. 모두가 노래 부르며 이 거리를 다시 걷고, 비로소 딛고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2009년 9월 개관한 인천아트플랫폼은 개항장거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일본 회사 사옥, 인쇄소, 창고 등 총 13채의 근대 건물들에 새 숨을 불어넣어 만든 문화예술 창작 공간이다. 오랜 시간 애물단지 취급받던 낡은 건물들은 창작 스튜디오, 공방, 게스트하우스 등 각각 새로운 보직을 부여받으며 쓰임에 맞게 탈바꿈했고, 그렇게 이곳은 글로벌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아지트이자 인천시 원도심 재생사업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곳이 되었다.
저마다 사연이 있는 붉은 벽돌은 비록 콘크리트보다 강하진 않아도, 강렬했다. 아파트나 빌라는 20년만 넘겨도 지친 기색이 역력한데, 무려 백여 년 전 지어진 건물들이 너무나 멀끔하고 근사해서 이곳의 역사를 여러 번 읊고 되뇌어도 지난 세월의 고초가 실감나지 않았다.
A동과 C동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시 <송출된 과거, 유산의 극장>과 호 추 니엔의 <무의 목소리> VR 관람을 마친 후 인천아트플랫폼 뒤편에 조성된 일명 ‘일본풍거리’로 향했다. 그리고 인천아트플랫폼과 마찬가지로 개항기에 지어진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카페에서 따뜻한 팥죽 한 그릇을 먹었다. 실의와 절망만이 빼곡했을 자리에 어느새 볕이 들고, 그 위로 그림과 시, 팥죽과 매화차가 놓인 이 겨울이 새삼 따스하고 향기로웠다. 찾던 것은 아니지만 오래도록 잊지 못할 단꿈 같은 오후였다.

[전시 정보]
<송출된 과거, 유산의 극장>
- 전통이라는 개념에 관한 포괄적인 의미들을 풀어내는 전시
- 전체 이용가
- 4월 10일까지

호 추 니엔의 VR 시어터 <무의 목소리>
-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일본의 이념적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교토 학파’ 철학자들에 관한 작품
- 14세 이상 이용가
- 4월 10일까지

※ 더 많은 사진과 기사 전문은 매거진 '빅이슈'269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 | 사진. 박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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