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시공간을 흔드는 비밀의 문, 운경고택 (1)에서 이어집니다.
이 글은 소설이다. 방금 이 말을 듣고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소설이라고 티를 내고 쓰는 소설이 어디 있느냐고. 그런 소설도 있다. 메타 픽션(meta fiction)이라고도 하는데, 대문호 보르헤스의 소설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선 이인성의 소설이 잘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소설 쓰는 소설’을 말한다. 본문의 텍스트뿐 아니라, 전시 사진 그리고 각주까지도 모두 소설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각주들은 완전한 진실이자 대체로 사실이 된다. 뭔가 포스트모던 머시기의 스멜이 나면서, 머리가 지끈거리는가? 그렇다면, 우선 이 소설을 읽으려는 당신에게, 잠깐 동안 눈을 감도록 권하겠다.
- <춘야>, p.15 중에서
<춘야>의 도입 부분을 읽으면서부터였다. 나를 둘러싼 시공간이 살짝 휘어지는 듯한 느낌이 든 건. 그때 고택 입구에 놓인 커다란 고인돌 같은 반석이 눈에 들어왔다. 옆의 소나무와 너머 긍구당(肯構堂, 조상의 유업을 잘 계승해 발전시킨다)이라고 쓰인 사랑채의 편액이 꽤 잘 어울린다 생각했는데 그 고인돌은 자연의 기물이 아닌 최정화의 작품이었다. <세한도>(2018)는 하와이 해변에서 작가가 수집한 스티로폼 부표다. 일종의 거대한 쓰레기가 고택의 앞마당에 놓여 있는 풍경은 절묘하면서 동시에 기묘했다. 추운 겨울을 견딘 소나무와, 지구 반대편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지구 반대편의 고택에 천연덕스럽게 자리 잡은 스티로폼 부표. 그림 자체보다 의미를 중요시하는 문인화의 대표 격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작품명으로 가져온 것 또한 절묘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Funny Game>, 1998
고택 출입문 앞마당에는 <Funny Game>(1998)이라는 제목의 경찰관 마네킹 한 쌍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1990년대 도로 곳곳에서 과속 차량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만든 감시의 아이콘이다. 엷게 느껴지는 학습된 위압감. 아무렇지도 않게 만져보고 옆에서 사진을 찍는 어린이 관람객 덕분에 무의식의 테두리가 허물어졌다. 그래, 이거 가짜지. 감시의 아이콘으로 만들어졌지만 정작 이 마네킹 때문에 놀라서 더 많은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이 작품은 한국 전시 당시 서울시 경찰청에 가서 작가가 직접 각서를 쓰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고. 하지만 국내외 다양한 전시에서는 호평받으며 최정화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세한도>와 <Funny Game>을 시작으로 운경고택의 사랑채, 뒷마당, 대청, 안채, 장독대에는 총 24개의 작품이 우리를 맞는다. 아니, 사실상 작품의 수는 훨씬 더 많다. 근대 조선과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작가들의 문인화가 방문, 옷장 문 등 집 안 곳곳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흥미로운 이 한 편의 소설 <춘야>까지.
여러 작품 중 내가 인상 깊게 본 것은 1000명에게 모은 밥그릇과 물병 등으로 꾸민 <거대한 밥상, 꽃의 향연 2022>였다. 사용감이 배어 있는 갖가지 식기들을 낮은 탑처럼 쌓은 작품인데, 그 낡고 바랜 일상의 기물들이 묘하게 아름다웠다. 운경 장학생 등 비영리 공익재단인 운경재단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사연이 있는 그릇들을 수집해 모은 참여형 전시다. 함께 밥을 먹는 식구. ‘운경’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다양한 경로의 연대를 가족의 의미로 확장한 것이다. <춘야>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그릇을 기증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이 담겨 있는데, 읽는 재미와 함께 왠지 뭉클해지는 감정도 들었다.

다른 속도, 다른 흐름의 전시
한옥이라는 공간이 지닌 속도감에 사람들의 발걸음도 덩달아 느려진 것일까. 주어진 1시간 20분간의 관람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관람객 대부분이 <춘야>를 읽고 걷다가, 최정화의 작품을 보다가, 다시 <춘야>를 읽으려고 멈추다가, 고택의 마루에 앉아 그늘과 햇빛 사이를 만끽하다가, 또다시 걸었기 때문일 테다. 마당과 대청마루, 여기저기 작품으로서 놓인 의자에도 걸터앉아 세로로 쓰인 소설을 더듬더듬 읽어가는 과정. 다른 전시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방식의 속도와 리듬이었다. 400여 년 동안 이어진 땅의 이야기, 현대사의 한 축을 지탱했던 집주인의 이력, 세계 유수의 갤러리와 전시를 거쳐 여기 고택에 놓인 예술작품, 모든 것이 빛나는 예술이라고 말하는 듯한 일상의 기물까지. 여러 축의 시공간이 한꺼번에 나를 통과했다. 입체적인 경험의 순간이었다. 납작하던 시간의 축에 기둥이 세워지고 바닥이 깔리더니 이내 그 사이로 향긋한 바람이 불었다. 그렇게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참이었다.
잠깐 동안 공중에 붕 뜬 듯한 비현실감을 느끼던 찰나 마루에 걸터앉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최정화 작가를 발견했다. 옆의 이는 다름 아닌 <춘야>의 작가 최영 소설가였다. 흔쾌히 옆자리를 내어주는 이 둘과 이야기를 나눴다. 과거를 들여다보고,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일련의 과정들을 하나로 응축한 이번 전시는 1년이 넘는 준비 기간 끝에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고택을 놀이터 삼은 성실한 예술가들. 올해는 최정화 작가가 활동한 지 3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 미술과 문학의 새로운 결합. 이 두 예술가는 운경고택에서 전에 없던 다른 형태의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운경고택의 전시 <당신은 나의 집>은 하루 5회, 회당 16명으로 6월 17일까지 열린다. 관람료가 비싸다는 리뷰가 많던데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체감은 다르지 않을까 싶다. 서부해당화의 꽃잎이 한 차례 꽃비가 되어 내리고, 몇 번의 해가 뜨고 다시 지는 사이 고택의 봄이 또 한번 간다. 시공간이 출렁이던 봄날의 오후. 일상으로 불쑥 들어온 춘몽의 시간을 뒤로하고 저벅저벅 다시 도심으로 걸어 나온다. 날은 좋고, 바람은 여전히 향긋했다.
글. 김선미 | 사진. 양경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