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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87 에세이

‘그냥’ 모이는 모임에 빠지다

2022.11.21


'처음엔 당근마켓으로 판매와 구매만 했다.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을 아무 조건 없이 내놓을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오래전에 산 장식용 인형은 아직 깨끗해서, 여행 가서 산 열쇠고리는 희귀해서, 천 원이나 2천 원씩 마음속 가격은 올라가기만 하고, 선뜻 무료로 이웃들에게 나눔을 할 만한 물건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내 생각을 바꾼 건 누군가가 보내준 철지난 잡지들이다. 당근마켓에서 2000년대 초반에 발행된 매거진 <TTL> 스무 권가량을 무료로 주겠다는 판매 글을 보게 됐다. 옛날 물건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있는 나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판매자는 배송비만 받고 번거로운 택배 배송까지 해줬고, 필요한 사람에게 물건이 가게 되어 기분이 좋다는 인사도 전했다. 이런 판매자들이 매너온도 99도를 받게 되는 걸까? 잡지로 받은 온기는 쉽게 꺼지지 않았고, 대가 없이 물건을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일이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옷으로 만난 이웃

나눔을 시작하자 안 쓰는 물건들은 빠르게 주인을 찾아갔는데, 그중 여러 물건을 교류한 당근 이웃과 친분을 쌓게 됐다. 특히 주요 판매 품목인 옷을 교류하면서 서로의 취향을 공유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옷장을 정리하면서 어떤 스타일의 옷이 많은지, 부족한 건 뭔지도 파악해서 다음 모임에서 옷을 교환했다. 중고거래 시장에서 판매 품목과 비슷한 가격대의 물건을 교환할 것을 제시하는 건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이미 여러 물건을 나눔 했기 때문에 그런 부담이 적었다. ‘라포’ 같은 것이 형성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옷장을 구경하는 건 장바구니를 들여다보는 것만큼이나 재미있었다. 이웃과 차를 마시거나 간단한 식사를 하는 등의 모임을 할 때마다 옷에 대한 수다를 떨기도 했다. 다채로운 색감과 소재를 좋아하는 이웃에게는 흰 티셔츠 같은 기본 아이템이 부족했고, 패턴이 없는 옷을 좋아하는 나는 단조로운 옷장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아이템이 별로 없었다. 쌓여 있는 옷 더미 속에서 한두 번 입었을까 말까 한 옷들을 매치해 이웃에게 스타일 제안을 하는 일이 흔해졌다. 둘 다 당근마켓을 활발하게 이용하다 보니 서로가 구매한 유용한 물건이나 거래하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공유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쉬운 모임

옷 교환부터 쇼핑몰 추천까지 하면서 모임의 주제도 조금씩 풍성해졌다. 책 이야기를 하거나 동네의 맛집에 방문하고, 서로의 친구 한두 명도 모임에 함께했다. 아주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옷 나눔이나 홍차 만들어 먹기 등 그날 꼭 하기로 한 일들이 있었지만, 점점 별 이유 없이 모이는 때가 많아졌다. 어제 본 OTT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나 계절의 변화, 컴백한 아이돌의 콘셉트에 대해 말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갔다. “코로나 좀 잠잠해지면 보자.”는 말을 반복하면서 지내온 몇 년간 생략된 대화가 일상에 활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우리의 다음 계획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한 리스 만들기다. 꽃 등 식물과 친한 이웃의 집에는 안 그래도 화분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번에 직접 생화로 리스를 만들어 집에 장식해보기로 한 것이다. 총 네 명이 함께할 예정인데 다섯 시간 정도, 장시간 작업을 해야 한다. 리스 제작이라는 메인 콘텐츠가 있지만, 그 외에도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점점 추워지는 시기에 필요한 아이템 추천과 벌써 끝을 향해 달려가는 2022년에 대한 아쉬움, 리스를 걸어둘 공간에 대한 고민 등. 예상 가능한 수다 주제와 함께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만 나오는 새로운 재미도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그렇게 또 ‘그냥’ 모이는 모임이 커질 것 같다.


글. 양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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