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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91 에세이

즉각적인 분노 대신 우아하게 요구하기 (2)

2023.01.18


이 글은 '즉각적인 분노 대신 우아하게 요구하기 (1)'에서 이어집니다.

자기 마음부터 살피고, 대응은 그다음에

ⓒ 그림. 최산호

그날 이후 저는 누군가에게 불편한 마음이 들 때 이 사람이 정말로 몰라서 실수하는 것일 수 있다는 가정을 기본으로 깔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제대로 모르고 있어 실수하거나, 알더라도 ‘그런다고 별일 있겠어.’ 하는 대충의 마음을 가졌다가 잘못하기 마련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 거죠.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황스러운 일을 겪으면 상대에게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다거나, 저를 무시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상종 못 할 인간이라고 속으로 아웃을 외치고 마음에서 조용히 삭제 버튼을 누르곤 했죠.

다음으로 화를 내기 전 제가 상대에게 원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작정 화를 내기만 하면 당장 기분이 후련해질지는 모르겠으나 그런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홧김에 심한 말을 내뱉고는 뒤끝이 찝찝해질 뿐이죠. 오히려 상대는 자기의 잘못을 후회하기에 앞서서 상대의 가혹함에 섭섭해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이 행동에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모르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라는 순차적 구조로 말하는 걸 연습했습니다. 지금도 남편과 싸울 일이 있으면 이처럼 기분 나쁜 포인트를 정확히 짚은 뒤 요구 사항을 종이에 써서 정리해보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반대로 말하면, 정확히 왜 기분이 나쁜지 모르겠다거나 요구 사항이 분명치 않다면 그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니 명확해질 때까지 자기 마음을 먼저 들여다봐야 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회사에 다닐 때 ‘~이 불편하게 느껴졌는데 모르셨거나 실수라 생각하니 앞으로는 이렇게 해주시면 좋겠다.’는 흐름의 대사는 6개월마다 한 번씩 바뀌던 대학생 인턴 친구들에게도 종종 써먹었습니다. 밤늦게 카톡을 보내는 친구에게는 ‘모르실 수 있을 것 같아 알려드립니다. 밤 11시에는 아주 급한 일이 아니라면 카톡으로 연락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카톡으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은 가급적 아침 8시에서 저녁 7시 사이에 해주세요.’라고 설명했습니다. 메일을 보낼 때 자꾸 ‘제목없음’ 상태로 보내는 인턴에게는 “혹시 모르실까 봐 말씀드립니다. 제목을 ‘제목 없음’으로 여러 번 보내셨더라고요. 이러면 업무상 확인해야 하는 메일이 많은데 눈에 잘 띄지 않기도 하고 추후에 받은 메일을 검색할 일도 생기기 때문에 제목에는 간단히 용건을 써주면 좋겠습니다.”라고 담담하게 회신해주는 식이었죠.

평가나 판단은 줄이고 다만 정확하게 원하는 바를 요구하기.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되 꼭 필요하다 생각되는 대응은 하기. 20대에는 이 두 가지를 체화해서 부정적 감정을 관리하려고 노력했고 이제는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런 방향으로 표현하는 게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저는 제가 사회 초년생일 때 했던 거대한 실수를 떠올리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죠. 없던 일로 하고 싶던 그 흑역사를 떠올리게 된 것도 최근 있었던 불쾌했던 일 때문입니다. 그런 걸 보면 업보는 결국 돌아오는 게 맞나 봅니다.

분노의 감정일수록 말보다는 글로

ⓒ 그림. 최산호

지난가을, 한 회사에서 지방에서 열리는 강의를 요청해왔습니다. 집에서 차로 네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어요. 봄과 가을은 여러 대학이나 도서관에서 행사가 많기 때문에 가장 바쁠 때입니다. 여유가 없는 시기여서 난색을 표하자 강의가 끝난 뒤 1박을 할 수 있는 숙소를 지원해주겠다고 하기에 이틀간 가족 여행을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진행을 하기로 했죠. 그런데 그 날짜가 되기 일주일 전, 담당자는 토요일 저녁에 카톡을 보내와 내부 사정으로 진행이 어려워졌다고 통보했습니다. 이후 동일한 날짜에 제안이 들어왔던 더 비용이 큰 강의를 거절했었고, 이틀 동안 여행을 가기 위해 가족과 스케줄을 조정해놓았는데 피해가 컸죠. 불쾌했지만 계약서를 써둔 것도 아니어서 정당하게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도 없었습니다. 그 결정을 담당자 혼자 내린 건 아닐 테니 사과를 받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죠.

저는 알겠다고 답한 뒤, 이전에 그 회사와 진행해둔 게 있어 해당 비용에 대해서 청구서를 발급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다시는 함께 일하지 않을 회사니까 빨리 정리해두고 싶었거든요. 그는 제가 사전에 안내받은 비용이 맞는지 한 번 더 확인하자 “네. 월요일에 다시 안내드리겠습니다.”라고만 답했고, 저는 대답을 본 뒤 필요한 서류를 보내두었어요. 한참 뒤,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이런 카톡이 왔습니다. “급하시네요.” 머릿속에 물음표가 수백 개 떠올랐죠. 제가 “급하시네요? 라고요?”라고 써 보내자 상대에게 이런 답이 왔습니다. “카톡을 다시 잘 읽어보세요. 비용 관련해서는 제가 월요일에 다시 안내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의 입장에서 ‘네’는 제가 비용을 확인한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던 거죠. 저는 “카톡으로는 그만 이야기하시죠. 월요일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쓴 뒤 대화를 중단했습니다. 주말이 지나고 관계자들에게 메일을 썼습니다. 그때 적은 이야기를 간단히 추리면 아래와 같습니다.

'갑자기 행사 취소를 통보하셔서 당황스럽고 불쾌했던 것이 사실입니다만, 제가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것은 그 때문이 아닙니다. ○○님의 이후 행동에 제가 불편함을 느꼈음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첨부한 카톡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님은 제가 드린 질문에 충분히 오해할 만한 답변을 하셔놓고, 주말 밤 10시에 저에게 “급하시네요.”라고 비난하는 듯한 카톡을 보냈습니다. 이 경우에는 감정적으로 남을 지적하는 말하기 대신 쓸 수 있는 다른 표현이 있습니다. “계산서 발급해주신 걸 확인했습니다. ○○만 원으로 금액 수정 부탁드립니다. 이 경우에는 ~게 처리하는 규정이 적용됩니다.” 이런 식으로 커뮤니케이션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님은 다음에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실 때는 그렇게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가 이 메일을 보내는 이유는 사과를 받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다음에 ○○님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식으로 진행했다가 향후 그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해입을지도 모르는 다른 분들이 걱정되어, 문제를 귀사에 알려드리고자 하는 취지로 이 메일을 씁니다.'

그날 오후 그 회사의 담당자에게서 전화와 메일이 왔습니다. 내부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공유했고 사과를 전한다고 했지만 그때쯤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메일을 쓰고 전송 버튼을 누르는 과정에서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니까요. 상대에게 사과를 받고 안 받고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상황은 더 커지지 않고 마무리되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서 어떤 말을 일단 쏟아내고 싶을 때, 대응하는 템플릿을 여러 개 만들어두고 상황에 맞게 내용을 채워보기를 추천합니다.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는 이유는 상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화를 표현하는 그 자체에만 집중하다 보면 감정만 상할 뿐 서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가 많으니 일단 그것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어요. 대체로 말은 즉시적으로 감정의 강도를 키우는 데 유리해서 우선 내뱉은 다음 후회할 때가 많지만, 글은 쓰기 시작하면 논리적 구조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바로 튀어나올 때보다 언제나 훨씬 나은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그게 분노의 말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글. 정문정
그림. 최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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