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서울의 간판들, 각자의 얼굴들 (1)'에서 이어집니다.
오래된 간판을 보며 어린 나의 모습을 회상하다

간판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고 중 하나입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어린 나는 버스를 타거나 걸어 다닐 때면 간판에 있는 글자를 읽거나 전화번호를 중얼거린 기억이 있습니다. 그땐 몰랐는데 버스에 멍하니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간판을 보는 것이 좋았었나 봅니다.
하지만 어느덧 30대 후반이 되니 여러 가지 ‘생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한 잘못된 선택에 대한 후회, 막막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빠진 것입니다. 사업 실패와 금전적 어려움, 결혼 생활의 불안정 등에 처해 있다 보니 자연스레 ‘어떻게 살아야 하지’ 싶어 막막했고, 항상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018년 겨울 어두운 골목길을 걷다 ‘청산슈퍼’라는 청파동 골목길에 있는 오래된 간판을 보았습니다. 우연히 마주한 오래된 간판을 아무 생각 없이 족히 10분은 바라본 것 같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에 빠져 살고 있었다는 걸요. 오래된 간판을 마주한 그 순간만큼은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 오롯이 ‘현재’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어릴 적 멋모르고 좋아하는 간판을 바라보던 때로 돌아가 있었던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이런 순간이 명상할 때 찾아온다는데, 저에게는 오래된 간판을 통해 찾아온 것 같습니다. 그렇게 2018년, 오래된 간판과 맺은 인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000여 개의 서울의 오래된 간판을 사진으로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간판의 재해석
가타쯔무리

명지대학교 근처에 위치한, 일본 셰프가 운영하는 우동 집. ‘대우전자 지정점’ 간판을 그대로 사용했다.
둥지Oh그린바

서울역 뒤 언덕에 위치한 샐러드와 파스타를 파는 가게. 오래된 비디오 가게를 젊은 감각으로 재해석했다.
형제상회

합정역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 레트로 감성의 지역 특산물 해물 포장마차로 재탄생했다.
20여 년간 희로애락을 함께한 서울에 바치는 작은 보답

서울의 오래된 간판을 찍으며 느낀 점 중 하나는 서울의 모습이 생각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간판도 그중 하나고요. 그리고 예전 기록물을 찾아보며 간판을 주요 카테고리로 정해 정리한 기록물이 없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생기면서 빠르게 사라져가는 서울의 모습과 오래된 간판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습니다. 서울의 오래된 간판을 기록하는 일은 20여 년을 잘 살게 해준 서울이라는 도시에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보답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개
양두환
부산에서 자라 현재는 서울살이 20년 차. 오래된 간판 사진을 수집하고 노포를 기록하는 ‘간판 사진 기록가’. 현재 녹번동 서울혁신파크에 있는 서울기록원에서 오래된 간판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블로그 ‘양작가의 피식미식’을 운영하며 서울 노포 탐방기를 전하는 중. 인스타그램 @old_sign_story
글 | 사진. 서울도감·양두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