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90년대 미국 시네필들의 성지였던 비디오 대여점 ‘킴스 비디오’는 우리 기억 속에 있는 비디오 대여점보다 더욱 독립적이고 특별한 공간이었다. 다른 대여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전 세계 독립영화, 학생 감독들의 단편영화를 포함해 30만 편의 비디오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었다. 배급사에서 상업적 이유로 선택받지 못한, 작은 영화들을 직접 테이프로 제작하고 소규모의 관객들과 만날 수 있도록 연결하는 장소.
데이비드 레드먼 감독이 처음 킴스 비디오에 들어설 때 밴드의 라이브 공연이 열리고 있었고, 감독은 온갖 문화적 세례를 받는 기분이었다고 술회한다. 마틴 스코세지, 쿠엔틴 타란티노, 코엔 형제, 짐 자무시 감독이 이곳에서 비디오테이프를 빌리던 회원이었다. 그러나 비디오 산업의 축소로 킴스 비디오 역시 2008년 폐업했다. 킴스 비디오의 용만 킴 대표는 그 방대한 컬렉션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살레미에 기증했다. 수년 후 비디오테이프는 무방비로 방치되었고, 킴스 비디오를 추적하던 데이비드 레드먼, 애슐리 사빈 감독은 비디오를 돌려받기 위한 작전을 펼치게 된다. 6년 동안 다큐멘터리 <킴스 비디오>를 촬영하며 이탈리아와 미국, 한국을 오가던 감독들에게 사람들이 묻는다. “왜 그렇게까지 하나요?” 좋아하는 일에 미친 듯 매달리는 사람들이 종종 듣는 질문. 영화 개봉을 맞아 <킴스 비디오>의 주인공 용만 킴 대표가 한국을 찾았다. 그 역시 자주 들었던 질문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어도,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킴스 비디오> 용만 킴 대표
킴스 비디오는 1980년대의 미국 영화에 엄청난 기여를 했습니다. 영화 속에도 당시 뉴욕 이스턴빌리지의 풍경이 잠시 나오지만, 당시 분위기가 어땠나요.
제가 정착한 동네가 이스트빌리지였어요. 당시에는 동네 자체가 굉장히 위험한 곳이었죠. 일단 홈리스들이 동네를 장악한 곳이었는데, 집이 없는 젊은 사람들이 버려진 건물에서 살다 매일 화재가 났죠. 월스트리트와 가까워 마약상도 많아서 갱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그런 곳이었어요. 위험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반면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었어요. 《빅이슈》라고 하니 저도 더 친근한 생각이 드는 게, 당시 홈리스와 저도 친구처럼 지냈거든요. 당시 미국의 홈리스 중에는 무소유, 무정부주의자가 많았어요. 거기가 무질서의 극치였는데, 저는 왜 그렇게 편안했을까. 무질서함 속에서 누구나 길에서 아름다운 재주를 펼칠 수 있는 그런 분위기였기에 두려울 게 없었어요. 길에서 색소폰 연주를 끝내주게 하는 홈리스와 대화 나누다 보면 별별 얘기가 다 나와요. 구로사와 아키라 등 일반적인 미국 사람들이 모르는 별별 감독들을 다 알고 있어요. 원래 ‘증권맨’이었는데 회사를 그만둔 뒤 이혼하고 홈리스가 된 친구도 있고 그랬어요. 이스트빌리지가 틀에 박혀 있지 않다 보니 위험할 수도 있지만, 젊었던 저에게는 ‘여기서 내가 할 일이 많겠다, 뭐든 할 수 있겠다.’ 하는 용기를 주는 곳이었어요. 제가 비디오 대여점을 열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이걸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나는 굉장히 하고 싶었던 일을 할 뿐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 하는 생각이 굉장히 강했어요.
비디오를 다시 돌려받으려 하는 감독 데이비드와 용만 사장님의 닮은 점이 그런 무모함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돌이켜보면 그래요. 내 마음대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 그런 생각이 있었으니까요. 당시에도 대형 비디오 대여 체인이 있었는데, ‘우리는 다르다.’는 생각이 컸어요. 이게 처음부터 사업을 시작한 동기였죠. 대중 상업 영화를 장르별로 구분해서 많이 빌려주고 돈을 벌겠다, 이런 목표가 없었어요. 몇 분밖에 안 되는 학생들이 만든 영화,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전 세계의 독립영화, 킴스 비디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영화들을 우리는 갖춰놨어요. 그게 미국 문화 속에서 우리가 가진 특별함이었어요.

ⓒ 영화 <킴스 비디오> 스틸
낯선 나라에서 어떻게 용기가 났을까요?
제가 좌충우돌을 많이 했어요. 젊을 때는 아이디어에 꽂히면 일단 일을 벌이고 봤어요. 얼마나 많은 좌절과 실패를 했겠어요. 근데 젊었으니까 그런 나이에 겪는 실패는 아무렇지 않았어요. 며칠 좀 괴롭고 그럴 일이지 인생을 결정짓는 실패는 아니니까요.
킴스 비디오에서 영향을 받은 미국 감독들이 많죠. <킴스 비디오>의 데이비드 감독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고요. 영화 제작 제의들을 다 거절했는데, 데이비드의 제안은 받아들이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문을 닫은 후 다큐멘터리 제작 제의는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거의 묵살했고, 데이비드의 제안 역시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그런데 3년 후 데이비드가 다시 찾아왔어요. 제가 거절했음에도 이미 찍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때 그 사람한테서 저하고 닮은 점을 봤어요. 남들이 안 된다고 해도 자기가 좋아하니까 그냥 하는, 그런 무모한 부분이 흥미롭게 다가왔고. 과거 킴스 비디오 직원들을 만나서 인터뷰한 영상들을 저에게 보여줬죠. 그리고… 제가 하지 말라고 해도 어차피 계속할 것 같더라고요.(웃음)
<킴스 비디오>는 영화에 미친 사람들의 다큐멘터리입니다. 허구와 가깝게 느껴지는 장면도 있는데, 픽션에 가까운 장면도 있나요?
이 영화의 감독 두 사람이 부부인데, 특히 애슐리의 센스가 무척 좋아요. 살레미 박물관에 갇혀 있는 비디오테이프들을 훔치는 그 장면은 약간의 허구도 있죠. 이탈리아에서 테이프를 다시 가져오는 그 과정이 실제로는 훨씬 더 길고 답답했어요. 살레미 사람들이 낙천적이기도 하고, 느리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계약과 달리 무성의한 부분도 있었죠. 몇 달 동안 회신이 없으니 저도 이탈리아를 여러 번 오갔어요. 기다림에 지치니 감독들은 ‘그냥 훔쳐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고도 해요. 그러다 보니 상상력을 발휘해 하이스트 픽션을 가미한 장면도 있죠.
이 글은 '<킴스 비디오> 용만 킴 대표 (2)'에서 이어집니다.
글. 김송희 | 사진. 강석균 | 사진제공. 오드(AU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