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북아현동 새글박터 추적기 (1)'에서 이어집니다.
3단계 : 새글박터의 또 다른 이름 발견
주변 탐문 조사 결과 새글박터는 인쇄소였던 게 유력했다. 도로명주소가 2014년 무렵에 전면 시행되었으니 새글박터를 운영할 당시에는 동으로 표기하는 지번 주소를 썼을 거였다. 지번 주소로 검색하니 흥미로운 글 하나가 발견되었다. 다음카페에 올라온 전국 오프셋 인쇄소 연락처 리스트였는데 그중 은평/서대문구 목록에 새글박터의 구주소가 있었다. 2007년도 글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16년 전까지는 인쇄소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업체명과 대표자명, 소재지, 대표 전화번호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한 가지 의아한 건 업체명이 새글박터가 아닌, 신문사로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새글을 한자로 하면 신문(新文). 갑자기 새글박터 간판 아래 뜯긴 시트지 아래로 한자 같은 게 보였던 기억이 났다. 그날 오후 잠깐 짬을 내 새글박터 건물로 찾아갔다. 건물 옆 주차장에 놓여 있던 긴 빗자루로 간판 아래 가려진 시트지를 살짝 들추니 거기에 ‘新文社’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닌가. 뭔가가 찌르르 내 몸을 관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새글을 박는다는 의미의 인쇄소. 공식 업체명은 ‘신문사’며 한글로 풀어서는 ‘새글박터’라 불리던 곳. 여기까지가 내가 알아낸 팩트였다. 혹시 ‘박터’라는 단어가 인쇄소의 옛말일 수도 있겠다 싶어 국립국어원에 문의 게시글을 올렸지만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출처를 알 수 없는 단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새글박터(신문사)의 대표였던 분을 만나면 명확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다 싶어 서대문구청, 대한인쇄문화협회에도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역시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나저나 충무로도 아니고, 을지로도 아니고 왜 북아현동에 인쇄소가 들어왔을까. 지근 거리에 서울특별시 서부 교육지원청이 있기도 하고, 복성초등학교나 한성중고등학교, 이화여대도 바로 옆이니 인쇄 수요가 꽤 있었던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상점 나비상회
4단계 : 과거 북아현동 골목 풍경을 입히다
인쇄소라는 윤곽은 잡혔지만 여전히 한글을 가르쳤다는 제보를 뒷받침하는 정보는 없었다. 이 동네에 새글박터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문득 이곳에서 꽤 오래 살았다는 우리 회사 건물주가 떠올랐다.
“새글박터요? 내가 여기서 50년 넘게 살았는데 처음 들어보네. 아, 나비상회 사장님이라면 알 수도 있겠다. 요 아래 아현역으로 내려가는 길에 나비상회라고 있어요. 거기가 이 동네에서 아마 가장 오래된 가게일 거예요. 문 연 지 한 4~50년 되었을걸? 거기에 한번 물어봐요.”
새글박터 건물과 같은 골목선상에 있는 나비상회. 2년간 이 동네에 머물렀지만 나비상회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한 적은 없었다. 편의점이나 대형 마트가 넘치는 시대에 도매 슈퍼 같은 모습이 조금 낯설었던 기억만 있었다. 이 동네의 터줏대감 같은 가게였구나. 박스째 펼쳐 놓은 과자나 채소 좌판이 새삼스레 정감 있게 보였다.

1975년, 2005년, 2023년 항공지도. 1975년만 해도 아파트 자리에 ㄷ자 형태의 한옥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것을 알 수 있다. 새글박터에서 나비상회로 연결되는 길은 오랫동안 과일과 채소를 파는 새벽시장으로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다(출처: 국토정보 플랫폼).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풍경이 달라졌지만 이 골목에 과일이랑 채소를 팔던 상점들이 양옆으로 쫙 들어서 있었어요. 가락시장이 생기기 전에 새벽시장 같은 역할을 여기가 했었지요. 소매업자들 대상으로 경매도 열리고. 새벽에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해야 하니까 물건을 가지런히 진열해둘 여유도 없었어요. 그냥 박스째 펼쳐놓고 파는 거지. 이야기한 그 새글박터라는 건물 위치가 시장의 끝자락이었던 거 같은데, 우리는 잘 모르겠네. ”
북아현시장길이라 불리던 이 골목의 과거. 지금은 커피숍이나 미용실 같은 가게들이 들어서 있고 그나마 한쪽 면 전체를 아파트가 차지해버렸지만 네이버 거리뷰로 그때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각종 도매 상회가 옹기종기 모여 있던 풍경이 화면 안에 열렸다. 말끔하게 정돈된 지금의 모습보다는 조금 어수선하고 번잡스러워 보이지만 이야기의 레이어가 훨씬 더 풍성하게 담겨 있는 듯한 골목들. 일산, 파주 일대에서 올라온 채소와 과일들이 박스째 펼쳐지고 동이 터 오기 전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시장 상인들의 생생한 에너지가 가득 찼을 골목들. 그 길 끝에 누군가가 쓴 새글들을 분주하게 인쇄하던 새글박터가 있었을 것이다.
허름한 간판 하나에서 출발한 호기심이 이 동네의 오래된 풍경을 주렁주렁 길어 올렸다. 새글박터에 관한 나의 추적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현주소로 등기부 등본을 떼어보니 신기하게도 건물의 주인이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앞서 찾은 인쇄소 리스트에 있는 대표명과 같은 이름. 언젠가 그를 만나 새글박터의 풀스토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구라도 북아현동 새글박터에 관한 기억이 있다면 아래 메일로 제보해주시길.
소개
김선미
서울 북아현동에서 기획 및 디자인 창작집단 포니테일 크리에이티브를 운영하고 있다. 단행본 <친절한 뉴욕>, <친절한 북유럽>, <취향–디자이너의 흥미로운 물건들>, <베이징 도큐멘트>를 썼으며 한겨레신문, <샘터> 등에서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현재 1930년대 한국 근대 잡지에 관한 단행본을 집필 중이다. [email protected]
글. 김선미 | 사진. 양경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