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치 아메리칸 걸스> 스틸 ©애플티비
사극 로맨스는 인기 있는 장르지만 그 본질에는 시대착오적 속성이 있다. 즉, 특정 시대를 묘사하지만 실은 재현의 대상이 된 과거나 재현되는 시점인 현재, 어느 시대와도 딱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별개의 서브 장르로 규정하지 않는 한, 로맨스는 헤테로 연애를 전제하고 결혼을 둘러싼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점검하는 스토리라인을 따른다. 시대가 바뀌고 남성과 여성의 권력 역학이 변화하는 시점에서 전통적인 연애 관계에 의문이 제기되지만 그래도 안전한 작품이 사극 로맨스다. 사회적 지위로 유형화된 인물들이 펼치는 연애물을 보더라도 현재와 멀리 떨어진 과거의 이야기라는 이유로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다. 결국 시대극은 전통적 헤테로 로맨스를 그리려는 욕망에 현대 여성으로서 가진 자존감을 투영하면서 일어나는 타협이다.
애플TV+의 <리치 아메리칸 걸스>(시즌 1, 전체 8부작)는 필연적으로 넷플릭스의 <브리저튼>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미국의 소설가 이디스 워튼의 1938년 공개된 미완성 유작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미국의 ‘황금시대(The Gilded Age)’가 시작되기 직전의 187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미 1995년에 영국과 미국의 합작 미니시리즈로 제작된 바 있는 이 작품이 2023년 애플TV+로 오면서 더 가볍고 화사한 색감을 입었다. 코르셋은 남아 있지만 바이커 재킷을 변형한 웃옷을 입는다거나 머리를 자유롭게 풀어 내린다거나 하는 유의 의상을 통한 각색은 <브리저튼>보다도 더 대담해 보인다. 팝을 편곡한 배경음악이나 다양한 인종을 등장시키는 선택에서도 현재 트렌드를 반영했다.
작품의 뼈대는 다른 각색과 유사하다. 때는 1870년대 뉴욕, 주인공인 애너벨 ‘낸’ 세인트 조지(크리스틴 프로세스)는 친구 콘치타(알리샤 보)의 결혼식을 맞아 들떠 있다. 미국 부자의 딸인 콘치타는 영국 귀족인 리처드(조시 딜런)과 결혼할 예정, 그의 배 속엔 아기가 있지만, 결혼식에서 아직 신랑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친구를 위해 낸은 창 너머를 바라보며 리처드의 모습을 찾고, 리처드는 마차를 타고 오다가 결혼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돌아가려고 한다. 다급해진 낸은 창 너머로 건물을 타고 내려가서 리처드를 붙잡으려 하고, 거기서 가이 스워트(매튜 브룸)라는 영국 신사를 처음으로 만난다. 낸의 설득 덕분에 콘치타의 결혼식은 무사히 치러지지만, 낸의 가족은 신흥 부자, 즉 뉴머니라는 이유로 뉴욕 사교계에서 멸시를 받는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리처드는 낸과 언니 지니(이모젠 워터하우스), 그리고 친구인 리지(오브리 이브래그)와 메이블(J. J. 토타) 자매를 영국으로 초대한다. 이제 자유분방한 미국 소녀들은 신대륙의 돈과 자유로운 분위기를 감고 영국에 상륙해 귀족 신랑감을 찾는다.
낸은 언니인 지니나 다른 친구들에 비해 자신이 수수하다고 생각하지만, 갈고닦은 지성과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다. 영국 사교계에서 주목받는 낸을 질투한 지니는 낸에게 가족의 비밀을 폭로하고 만다. 충격받은 낸은 콘월로 여행을 떠나고, 그곳 바닷가에서 자칭 화가라고 하는 테오(가이 레머스)를 만난다. 하지만 테오의 진짜 정체는 구혼자들에게 지친 틴터절 공작이고, 이제 미국 소녀 낸은 공작부인이 되어달라는 청혼을 받는다.
이 글은 '<리치 아메리칸 걸스> (2)'에서 이어집니다.
소개
박현주
작가, 드라마 칼럼니스트.
글. 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