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강릉 창작자의 별장 (1)'에서 이어집니다.

창작자의 별장 2기 숙소인 영진해변 근처에 자리 잡은 오르도 © 오르도(ordo)
환영 차담으로 문을 연 <창작자의 별장>
<창작자의 별장>은 ‘창작자들이 자신의 작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강릉 일주일 살기 여행 프로그램’이다. 운영 주체는 ‘청개골 마을호텔’로 경해진 대표가 만든 1인 로컬 여행사다. 일단 강릉에 도착한 후 창작에 집중할 수 있는 감도 높은 지역 숙소와, 느슨하게 연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프로그램, 그리고 섬세하게 큐레이션 한 지역의 아지트 같은 공간들을 전해 받고 나면 온전히 혼자만의 몰입이 시작된다. 누군가는 여기서 쌓여 있던 생각들을 글로 풀어낼 테고, 또 누군가는 오랫동안 정리하지 못한 포트폴리오를 맘 잡고 정리할 것이다. 그냥 침대에 누워 가만히 파도 소리를 들으며 머릿속 가득 띄워져 있던 수십 개의 창들을 하나하나 끄는 시간이어도 무방하다. 공식 홈페이지 설명에 의하면 ‘창작자의 별장’이라고 일컫지만, 창작자를 특정 영역의 사람들로 한정 짓지는 않는다. 책상에서 창작 작업을 하는 사람, 무언가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대상이 된다. 2023년 7월에 있었던 1기 모집 때는 에세이툰 작가, 웹소설 작가, 콘텐츠 마케터, 그래픽 아티스트 등이 참여했다고.
작정하고 떠나는 몰입을 위한 여행. 그 시작과 끝에는 <창작자의 별장>을 기획한 경해진 대표와의 환영 차담과 송별 차담이 있다. 5박 6일 프로그램 중 유일한 공식 스케줄이었다.
“쏟아지는 정보의 소란에서 멀어지고 싶은 당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정신을 빼앗기는 것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데에 집중하고 싶은 당신을 위해 준비했어요.”

자연의 변화가 하나하나 느껴지는 강릉 / 창작자의 별장에서 내내 들리는 영진해변의 파도 소리
텀블벅 페이지에서 먼저 만난 문장들처럼 다정하고 적정한 거리가 지켜진 환대의 시간들. 참여자들은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곤 어떤 작업을 하는지, 5박 6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에 관해 나눴다. 경해진 대표는 먼저 강릉에 내려와 정착한 친구의 시선으로 그 몰입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제안했다. 믿을 수 있는 든든한 로컬 친구가 생긴 기분. 강릉의 풍경들이 조금 더 진하고 분명해지고 있었다.
<창작자의 별장> 프로그램 안에는 원고나 그림 등의 작업물을 한 권의 소장용 책으로 만들어주는 ‘책등의 시선’이라는 서비스가 있다. 전부터 가지고 있던 원고여도 되고 5박 6일간 창작한 작업물이어도 된다. 그렇게 몰입의 시간은 휘발되지 않고 물성을 지닌 네모의 형태로 남는다. 나는 그간 조금씩 써 놓은 에세이를 모아볼 생각이었다.

창작자의 별장에서 내내 들리는 영진해변의 파도 소리
파도 소리가 만드는 몰입의 형태와 질감들
강릉에 머무는 6일 중 하루를 빼곤 모두 비가 내렸다. 실내에 틀어박혀 딱 몰입하기 좋은 날씨였지만 나는 서울에서의 발바리(?) 근성을 못 버리고 그 아늑한 숙소를 벗어나 비 오는 바다로, 주문진 좌판 어시장으로, 감자옹심이를 파는 시내 맛집으로 널을 뛰며 다녔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밤에는 아주 쉽게 몰입의 모드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파도 소리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규칙적이면서도 매번 디테일이 다른 자연의 소리. 아무리 들어도 소음으로 읽히지 않는 적절한 데시벨에 정신이 명료해졌다. 어쩐지 안심이 되는 기분도 들었다. 자연의 소리로 꽉 차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고 생각들은 흔쾌히 모였다가 또 흩어졌다. 바쁜 일들에 우선순위가 밀려 저 멀리 밀어 놨던 글들을 책상에 한가득 펼쳐 두고 한 줄 한 줄 매만지다 보면 몇 시간이 훌쩍 갔다. 영 진도가 안 나갈 때면 책상 위에 정갈하게 놓인 큐레이션 도서들을 뒤적거렸다. 평소라면 독서에 온전히 집중하는 데 적지 않은 예열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신기하게도 쏘옥 책 안으로 금세 빨려 들어갔다. 오랜만에 느끼는 독서 감각은 몸이 먼저 기억했다. 글자를 읽는 동시에 그것들이 이미지가 되고, 그 이미지가 글 안의 상황들을 관찰할 수 있게 도와주고, 그 관찰의 과정에서 질문이 만들어지고, 그 질문이 다시 내 삶 안에 툭 던져지는 과정. 그 와중에도 파도 소리는 멋진 BGM이 되어 내내 공간을 채웠고 그렇게 매일 밤 순도 높은 나만의 시간이 흘렀다. 몇 권의 독서와, 몇 편의 글과, 몇 가지 결정들이 이루어지는 밤이었다.
5박 6일은 역시나 생각보다 짧았다. 하지만 10박 11일이었어도 체감 속도는 비슷했을 것이다.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때쯤이면 떠나온 시간들은 언제나 아쉬움으로 압축되어버리니까. 송별 차담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아침에는 진눈깨비와 눈이 섞여 고속도로에 두터운 얼음 카페트가 깔렸다. 곳곳에 멈춰 있는 4중, 5중 추돌 사고 차량들을 목격하며 최대 100km까지 달리는 고속도로를 시속 30km로 엉금엉금 기어간 게 이 여행의 피날레다. 자연의 변화무쌍함을 온몸으로 느꼈던 5박 6일. 그 안에는 얇은 파도 소리의 막에 감싸진 몰입의 시간이 있었다. 강원도에 가면 맥주 한잔 같이 나눌 수 있는 로컬 친구가 생긴 것도, 꼼지락꼼지락 써 놓았던 에세이들이 반듯하게 책 한 권에 담긴 것도 다 이번 강릉행 덕분이다.
가끔 눈을 감으면 그날 강릉에서의 파도 소리가 들린다. 몰입의 스위치가 탁 하고 켜지는 순간. 공중에 부서지는 새하얀 파도 소리와 함께 2024년을 시작한다.
* 청개골 마을호텔
청개골은 ‘청개구리의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닌 가상의 마을이자 공동체다. 인구가 감소하는 지방 소도시 주민들의 빈방을 호텔 객실로 조성하여 지역에서 살아보기를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숙소와 지역살이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창작자들이 작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강릉 일주일 살기 프로그램 <창작자의 별장>과 퇴직 등 인생의 전환점에 선 사람에게 사적인 사유를 돕는 강릉 한 달 살기 프로그램 <인터미션 어웨이>를 운영하고 있다. 로컬을 중심으로 한 생활 공동체를 꿈꾸는 경해진 대표는 본인이 기획한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이 언젠가는 강릉의 멋진 이웃이 되기를 바란다고.
소개
김선미
서울 북아현동에서 기획 및 디자인 창작집단 포니테일 크리에이티브를 운영하고 있다.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 결국 반짝이는 것들에 관해 꾹꾹 눌러쓴다. [email protected]
글. 김선미 | 사진. 청개골 마을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