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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8 에세이

서울 동네 -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이상한 서울 여행 <효창공원>

2024.05.08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지하철역에 내려 완벽한 여행자의 시선으로 서울을 바라본다. 시간 축과 공간 축을 재설정한 후 만난 낯설고 이상한 서울. 멀리 떠난다고 해서 다 여행이 아니듯, 가깝다고 해서 다 일상일 리 없다.


글. 김선미 | 사진. 양경필

회사를 처음 세우며 했던 결심이 있다. 작은 회사만의 문화를 만들자! 그렇게 시작된 게 ‘크리에이티브 투어’와 ‘포니데이’다. 크리에이티브 투어는 3년 이상 근속자에게 일정 비용과 휴가를 주고 여행을 떠나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내가 다니던 전 직장의 복리 후생을 살짝 베낀 것인데 회사를 만들고 10년이 넘은 지금까지 다행히 잘 이어지고 있다. 포니데이는 두 달에 한 번 진행하는 문화 활동으로, 구성원이 같은 문화 경험을 한 후 각자의 관점을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일과는 무관한 창의적인 경험을 해보자는 야심 찬 기획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막상 바쁜 일이 생기면 슬쩍 다음 달로 미루기도 하는 그런 활동이다. 그간 스탠딩 코미디를 함께 관람하기도, <수프와 이데올로기> 같은 생각할 거리가 많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러 가기도, 또 성수동의 힙하다는 전시를 보고 상술이다, 예술의 또 다른 향유 방식이다, 날 선 토론을 하기도 했다. 빡빡하게 돌아가는 클라이언트 프로젝트 사이에서 해방감(!)을 맛볼 수 있는 날이기도 하지만 막상 관점이 잘 나눠지고 있는지, 하루 노는 것으로 끝나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뭐, 하루 노는 걸로 끝나면 또 어떠랴 싶기도 한 것이다.

낯설고 이상한 서울 여행
‘이상한 서울 여행’. 2024년 첫 포니데이의 콘셉트는 입사 2년 차인 막내 직원이 호기롭게 제안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그간 포니데이가 주로 문화를 향유하는 데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구성원들이 창의적인 기획을 해야 하는 콘셉트.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2월 20일, 올해 첫 포니데이가 시작되었다.

1 .행정구역상 서울에 있는 총 229개의 지하철역 중 선정 기준에 맞는 역 리스트업 (오래되어 이야깃거리가 많은 역 / 노선이 겹치거나 출구가 많은 역 / 각 호선의 서울 끝 역 등)
2. 최종 리스트업한 24개 역 중 각자 두 개씩 무작위 제비뽑기
3. 두 개 역 중 사전 조사 후 각자 최종 여행지 한 개 역 선정
4. 포니데이 당일 회사가 있는 2호선 아현역에서 동시 출발
5. ‘이상하고 낯선 서울 여행’이라는 콘셉트로 하루 동안 해당 지하철역 및 인근 여행
6. 2주 후 각자 사진과 글을 엮어 리뷰

내가 뽑은 역은 옥수역(3호선)과 효창공원역(6호선, 경의·중앙선)이었다. 두 군데 다 한 번도 내려본 적 없는 낯선 역들. 그중 더 마음이 간 곳은 효창공원역이었는데 꽤 오래전, 흥미로운 물건을 많이 팔던 ‘우주만물’이라는 편집숍이 처음 효창공원 인근에 문을 열었던 사실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아,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다. 내가 아는 관련 정보라곤 그 두 가지가 다였다. 일단, 효창공원역으로 좁히고 이런저런 리서치를 시작했다.



효창공원, 파란만장한 땅의 맥락
효창공원의 원래 이름은 효창원. 정조의 큰아들 문효세자(1782~86)의 묘소로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는 뜻의 ‘효창묘’로 지어진 후, 1870년 고종에 의해 ‘원’으로 성역화됐다. 문효세자뿐 아니라 이후 세자의 어머니 의빈 성씨도 이곳에 안장되었다. 왠지 낯익다 했더니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주인공 성덕임(이세영)으로 더 잘 알려진 그 의빈 성씨다.
소나무와 밤나무 숲이 우거져 고즈넉한 풍경을 만들어내던 효창원은 근현대사에서 크고 작은 수난을 겪게 된다. 먼저 1921년 일제가 효창원의 숲을 파헤쳐 골프장을 만든 것.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이라 불리는 경성골프장이다. 문효세자 묘를 빙 둘러 감싼 골프 코스를 만들고 조선 호텔의 외국 관광객들을 유치했다. 시종일관 왕조들의 능이나 원의 성역화를 훼방 놓던 일제는 패망 직전인 1944년 10월 문효세자의 묘소를 비롯한 모든 묘소를 경기도 고양군 서삼릉 경내로 이전해버린다. 효창원은 그 의미를 완전히 잃은 채 ‘효창공원’으로 전락한다.
파란만장한 땅의 역사를 지닌 효창공원은 1945년 11월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에 의해 다시금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생명을 다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송환해 국민장을 치르고 이곳에 안장한 것. 이후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등 독립운동가의 유해뿐 아니라 서거한 백범 김구 또한 효창공원에 묻히게 된다. 광복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성지로 민중의 참배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리서치 전까지는 전혀 모르던 사실이었다. 나름 근현대사에 관한 관심도 많고 공부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백범 김구의 묘역이 서울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착잡한 마음을 품은 채 포니데이 당일, 효창공원역으로 이상한 서울 여행을 떠났다.


차곡차곡 쌓이는 다른 시공간
2호선 아현역에서 출발해 홍대입구역에서 경의·중앙선을 갈아탄 후 효창공원역으로 가는 루트였다. 평일 오전 10시 30분 무렵에는 그 복잡한 홍대입구역도 눈에 띄게 한산했다. 오후에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 때문에 다들 외출을 덜 한 걸까. 특히 경의·중앙선 노선들은 유독 인구밀도가 낮았는데 그런 한적한 서울도 꽤 오랜만이었다. 효창공원역에서 내리는 사람 중 효창공원 방향인 1번 출구로 나오는 사람은 나 말고 한 명뿐이었다.
1번 출구로 나와 오르막길을 따라 효창공원으로 향했다.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를 한 10여 분 걸었을까. 저 멀리서 함성, 박수 소리 같은 것들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효창공원보다 먼저 만난 효창운동장.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의 축구 시합이 한창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0년 효창공원 일부를 훼손하며 효창운동장을 세우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구 묘역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반공투사위령탑을 세웠다.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있는 곳. 파란만장한 땅의 맥락이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효창공원 입구를 지나자 제일 먼저 파란색 상징물이 눈에 들어왔다. <점지>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성역의 현대적인 해석과 상징성의 전달을 극대화하고자 했다.’고 기획 의도가 적혀 있었으나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연못 한가운데 대못을 박은 것 같은 형상이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 때문일 수도, 긴 시간 수난을 겪은 땅의 역사를 이제 막 알아서일 수도 있다. 이 공간에 세워지기에는 지나치게 날카롭고 차가운 조형물이라는 생각을 하며 공원 안쪽으로 걸었다.
공원 안에는 산책을 하거나 가볍게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친근한 동네 공원의 느낌이 먼저 들었다. 곳곳에 설치된 운동기구는 부지런히 쓰였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반들반들 윤이 났는데 방치되어 녹슬거나 먼지 쌓인 도심 속 운동기구들과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다. 그 반들반들한 운동기구에 몸을 맡긴 채 열심히 체력 단련을 하는 사람들을 지나면 산책로 너머로 잘 관리된 봉분들이 보인다. 영 낯설고 이상한 풍경이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가 모셔진 삼의사 묘역. 맨 왼쪽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게 되면 모실 가묘도 마련되어 있다. 묘지가 만들어지기 전 저 언덕배기 능선들을 따라 경성골프장의 골프공들이 날아다니고, 조선총독부 주최 식수 행사가 열리고,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이재민들의 천막촌이 들어섰겠지. 이상한 서울 여행. 시간 축과 공간 축이 재설정되며 눈앞에 보이는 풍경 위로 차곡차곡 다른 시공간이 쌓이고 있었다.


다시 발굴해야 할 땅의 기억
효창공원에 조성된 산책로를 걷다가 뭔가 낯설다 싶었는데 도시의 소음이 완벽히 사라진 것을 그제야 자각한다. 그 공백에는 대신 새소리가 들어찼고 이따금 부는 바람에 대나무숲이 싸아싸아 허스키한 목소리를 냈다. 가만히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여러 소리들을 더듬는 시간. 어쩐지 100년 전에도, 200년 전에도 이곳에서 들렸을 것 같은 소리들이다. 한참 동안 감고 있던 눈을 떠보니 어지럽게 얽혀 있는 나뭇가지들 사이에 검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저 나뭇가지들이 얽히고설킨 이곳의 이야기들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백범 김구의 묘역, 백범기념관, 이봉창 의사 동상을 둘러본다. 그 사이에 있는 대한노인회관과 백범 김구 묘역을 내려다보고 있는 반공투사위령탑도 지나간다. ‘너무나 많은 의미가 들어서면서 단 하나의 의미도 갖지 못한 공간’. 효창독립 100주년 메모리얼프로젝트 홈페이지(hyochangpark.com)에서 본 저 문장이 계속 내 발걸음을 따라다녔다. 투둑투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한참을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걸었다. 그러고 싶은 날이었다.
내일은 포니데이 리뷰를 하는 날. 그날 공원 벤치에 앉아 녹음한 새소리를 먼저 틀고,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 효창공원 안에 쌓인 이야기들을 하나둘 풀어봐야지. 효창공원 둘레길 중국집 신성각에서 1935년생 김정희 씨와 합석해서 겨우 먹은 수타 짜장면 이야기도 하고, 그녀가 들려준 ‘하꼬방(판잣집)이 가득하던 효창공원 일대’ 이야기도 펼쳐놔야겠다. 서울의 보이지 않던 점선들이 한층 더 또렷해진 시간들. 멀리 갈 필요 없는, 이상한 서울 여행은 계속된다.


김선미
서울 북아현동에서 기획 및 디자인 창작집단 포니테일 크리에이티브를 운영하고 있다.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 결국 반짝이는 것들에 관해 꾹꾹 눌러쓴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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