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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196 에세이

식물이랑

2019.06.05 | 겨울의 꽃이 춤을 춥니다

2월입니다. 드디어 1월의 힘찬 기합에 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직 손발이 시리고 문득문득 우울한 기운이 드리 우지만, 그래도 겨울은 이미 한풀 꺾인 모양새입니다. 서서히 봄맞이 준비 를 시작해야겠어요. 올해의 월동은 대 단히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작년 겨울은 정말 혹독했지요. 텃밭에 살던 유 칼립투스나무도 죽어버리는 무서운 겨울이었습니다. 올해는 그리 매섭게 춥 지도 않았고, 눈도 많이 안 내렸네요. 신나게 눈을 구경한 날이 얼마 없어서 조금 아쉽긴 합니다.

가드너의 1년은 계절별로 꼭 해야 할 일과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봄에 상추와 루콜 라 씨앗을 심는 일은 꼭 해야 할 일 에 속합니다. 고수와 깻잎도 잊지 않 고 심습니다. 봄, 여름, 가을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뜯어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여름엔 금방 목말라 하는 식 물 친구들에게 물을 충분히 주고, 병 충해 피해를 받지 않도록 주의를 기 울이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요. 가을에 가장 중요한 일은 뭐니 뭐니 해도 월 동 준비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 필요 한 식물들의 화분을 바꿔주고, 새 흙 을 덮어주고, 시든 이파리들을 정리하 거나 가지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가 을은 충분히 바쁘지요. 하지만 폭신한 흙 깊숙이 동그란 알뿌리인 구근을 심 어둔다면 한겨울에 집 안에서 꽃이 피 어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귀여운 구근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자 라고 이파리를 올리고 꽃이 피어납니 다. 구근 심기는 안 해도 그만인 일에 속하는 편이지만, 막상 심어두면 겨울에 기쁨을 만끽할 수 있어요.

봄의 꽃은 막 깨어나는 계절을 알려줘서 귀하고, 여름의 꽃은 탐스럽고 아름 다워서 귀합니다. 가을의 꽃은 그 나름 의 정취와 쓸쓸함을 입고 있어서 귀한 데, 모든 계절의 꽃을 통틀어 가장 귀 하고 아름다운 꽃은 겨울의 꽃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식물 키우기를 취 미로 하면서도 사실 꽃을 보기 위해 식물을 키우는 건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커다란 이파리의 무늬 나 질감이 멋진 관엽식물과 선이 예 민하고 아름다운 목본류를 더 선호하 는 편이지요. 그래도 매해 구근 심기 를 게을리하지 않고, 꼭 한겨울에 꽃 을 피워 구경하는 걸 보니 이제는 “꽃을 피우려고 식물을 키우는 것은 내 취향 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멈춰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방에선 붉은색 겹꽃을 피운다는 튤립 구근이 가장 먼저 피어났습니다.

뾰족하게 올라온 이파리는 금방 키가 훌쩍 자라더니 꽃대가 올라와 봉오리 가 잡혔는데, 꽃이 흰색이어서 무척 당황했습니다. 꽃잎이 하얗게 올라와 서 점점 붉게 변하는 종이라고 하더군요. 매끈한 꽃잎이 천천히 물들기 시 작해 금세 수분과 영양이 가득 찬 탐 스러운 꽃망울이 열렸습니다. 꽃이 열 리는 동안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꽃을 구경하는 게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이 됩니다.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도 뜨겁게 피어난 튤립은 매일매일 춤추는 모습을 보여줬지요. 꽃망울이 열리고 살짝 벌어지는 동안 튤립은 마치 발레 무용수 같았습니다. 아주 우아하고 고혹적 이었죠. 천천히 피어오르며 발레를 추던 튤립은 이틀쯤 지나자 이파리를 오렌지빛으로 물들이며 장르를 스윙 댄스로 바꾸어 흥겹고 요란하게 춤추는 가 싶더니 어느덧 만개하고 나서는 마치 뷔를레스크Burlesque를 보는 것 같았지요. 그 풍성하게 뽐내는 춤을 볼 사람이 혼자라 아쉽더군요. 빠르고 강렬하던 춤사위가 다 지나가고 나서 튤립은 조금 편안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이파리에서 수분과 영양이 빠져 나가고 있었지요. 튤립이 추는 마지막 춤은 아주 느린 왈츠였네요.

튤립의 춤이 끝나갈 무렵 백합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껏 백합 구근은 키워본 적이 없어서 호기심에 튤립과 함께 심어본 것입니다. 그저 백합이 어떤 모양으로 자라 나는지 궁금했습니다. 백합은 얇은 이 파리를 열심히 올리며 키를 먼저 키우더군요. 빠르게 쭉쭉 자라났습니다. 키가 1m 남짓 자랐을 때 꽃봉오리가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하게 시작한 꽃봉오리가 손가락 두 마디만 해지고, 손바닥만큼 크게 자랐습니다. 꽃망울이 언제 터지나 한참 동안 기다렸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치나 싶던 어느 날 아침, 드디어 그 커다란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동안 절화로 만난 백합들은 대단히 매력적인 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커다랗고 화려한 꽃이라고 생각했 죠. 꽃술이 요란하고 꽃가루가 성가신 꽃일 뿐이었습니다. 백합처럼 홑겹의 꽃보다는 작약 같은 겹꽃을 훨씬 좋 아하기에 백합의 매력은 그리 대단치 않았습니다. 백합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해서 열심히 꽃술을 잘라줬습니 다. 잘라주지 않으면 금방 꽃잎과 바닥에 꽃술이 떨어져 노랗게 물들어버리니까요.

곱게 피어난 백합이 다섯 송이를 넘 기고 열 송이를 넘기면서 온 집 안에 백합 향기가 황홀하게 퍼지기 시작했 습니다. 후각이 마비될 지경으로 강한 백합 향기를 맡으며 생활하는 건 상상 이상으로 즐거운 일입니다.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는 밤이면 온종일 미세 먼지와 도시의 소음에 지친 몸과 마음이 즉각 치유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파리의 섬세한 질감과 유려한 곡선, 한없이 뿜어내는 향기까지 모두 아름 답습니다. 이제껏 왜 백합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나 생각하며 이제 매해 가을 에 백합 구근을 심는 일은 빼먹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사족인지 모르겠으나 혹시 이 글을 읽고 튤립이나 백합을 들이려는 분을 위해 노파심에 적어두자면 백합과 식물은 반려동물에게 꽤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개나 고양이에게 해로운 튤리팔린tulipalin 성분을 지니고 있어서, 반려동물들이 섭취했을 경우 자칫 치명적일 수 있으니 반려동물을 키우는 분들이라면 부디 조심하세요.

겨울은 길고 우울합니다. 연말도 우울하지만 무언가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기분에 갇혀 지내는 연초도 우울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공기를 기쁘게 해주는 튤립과 백합이 있어서 무사히 겨울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닐까, 고마운 마 음으로 조금 남은 겨울도 안전하게 보내봐야겠어요. 그리고 이제 코너를 돌면 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씨앗을 뿌리는 날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Writer·Photographer 임이랑
Editor 문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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