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서 나만의 방을 찾아 떠나겠다고 다짐했던 나는 이제서야 여정의 초입길에 들어섰다. 지금 나는 저 멀리 바다를 가늠할 수 있는 프레이저 강가의, 꿈꿔온 것보다 더 아름다운 공간에 잠시 짐을 풀어 살아가고 있다. 밴쿠버의 악명 높은 렌트비를 다달이 감당하며 사는 처지라 나만의 방이라 이르기 멋쩍지만 소유하지 않아도 뭐 어때. 공간은 그릇 같은 것이니 나 하나 오롯이 담아내면 충분하지. 여기에다 내 안에 더 큰 세계를 담는다면 더욱 걱정 없다. 나는 이곳 하늘빛 물에 복잡한 머리를 헹구어내고 창문만 열면 들려오는 기러기, 거위, 오리, 까마귀 그리고 이름 모를 새의 언어들을 가만히 듣는다. 공기다운 공기로 평범하게 숨을 쉬고 막힘 없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무엇이든 잘 보는 연습도 겸하고 있으니, 여행의 시작이 참 괜찮다.
이곳은 한국에 두고 온 작은 방. 눈이 맑은 토끼 둥이의 한 시절을 함께 담아주었던 너그러운 공간이다. 알고 보니 닮았다. 거울을 놓은 듯 지금 살고 있는 공간과 많이 닮았다. 커다란 창과 탁 트인 시야, 공항을 막 떠나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들, 창가 곁의 온통 하얀 침대와 그 앞의 조그만 작업 공간까지. 방은 나를 담아내서 나를 닮아가나 보다. 앞으로 또 어떤 새 공간과 옛 공간 사이에 거울을 놓으며 살아가게 될까. 나처럼 자기만의 방을 찾아나선 모든 버지니아 울프들이 마침내 바라던 곳에 다다르기를. 자신을 닮은 방을 만나게 된다면 더 좋겠다. 그리고 나는 온갖 고생이 때묻은 아름다운 방에서 푹 쉬다가 언젠가 다시 짐을 꾸려 떠날 것이다.
글·그림 이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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