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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18 에세이

연희동을 좋아하세요…

2020.01.08 | 내 친구가 사는 연희동에 갔다

어른이 되면 삶의 정수리를 내려다볼 줄 알았습니다. 매일 아침 우유를 마시고, 챙겨 먹기 귀찮은 영양제들을 삼키면서, 언젠가는 나의 키가 삶보다 세 뼘 정도는 더 커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날이 오면, 저 달은 왜 나를 계속 쫓아오는지, 엄마 아빠도 눈물을 흘리시는지, 탄산음료는 왜 몸에 안 좋다고 하는지, 전부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려운 영화들도 척척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서너 개 나라의 언어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나를 소개하는 글도 잘 적을 수 있을 것 같았죠. 앞으로 찾아올 변화들을 열심히 기다렸습니다.

일주일 동안만 손으로 만지지 않으면 사라지던 뾰루지가 이제는 고집이 꽤나 세졌습니다. 공을 차고 놀던 초등학교 운동장의 골대는 작아졌고, 집 천장에 손을 뻗으면, 까치발을 서지 않아도 충분히 닿더군요. 하지만 세상을 펼쳐보면 내용은 아직도 '~같다'라는 문장의 물음표들로만 빼곡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겨우 삶의 무릎 정도 높이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을 구분 짓는 것조차 벅차게 느껴지고요. 이렇게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지만 변화는 매일 밤 제 방 문을 무섭게 두드립니다. 이런 애매하고 모호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열심히 영화를 봐왔습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영화 <하나 그리고 둘>(2000)에 나오는 대사처럼 '일상을 통해 얻는 것 말고도 영화를 통해 두 배의 삶을 더 경험'한다면 어릴 때부터 꿈꿨던 삶의 전문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영화를 통해 배운 게 있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은 때가 되면 우리의 곁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영화처럼 삶에도 러닝타임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가능하면 우리가 할 수 있을 때마다, 행복을 나누고 함께하는 것이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진이와는 각자 저마다의 취향이 확실한 영화 모임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서로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는 모르지만, 애진이를 따라서라면 강남도 갈 수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애진이의 대학 입시 이야기가 종종 생각나.

연극영화과 시험이었는데, 시를 읊으면서 묘사하는 연기를 했어야 했어. 국어 시간에 많이 봤던 시라서 금방 외웠지. 보통 입시 보러 가면 교수님들이 지루해하시거든, 그런데 그때는 내가 시를 다 외워서 그랬는지 몰라도 주목하셨어. 형식적인 질문 말고 약간의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입시하면서 교수님들과 소통을 했다는 느낌을 처음 받았어.

끝날 즈음에 "롤모델이 누구야?"라고 물어보셨는데 아마 '어떤 배우가 되고싶어?'라는 질문이었겠지? 그래서 "나문희 선생님처럼 되고 싶어요."라고 했는데, 교수님들이 이유도 묻지 않고 "거기서 나문희가 왜 나와, 전도연이나 김혜수가 나와야지."라고 하셨어. 그래서 그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어. 나문희 선생님은 어디에 나오시든 나에겐 낯선 느낌이었어. 작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시잖아. 연극, 영화나 드라마, 시트콤까지 다 하시고. 나는 내가 하려고 하는 연기를 오랫동안 다양한 인물들을 표현하면서 다양한 부문에서 하고 싶다는 얘기였지.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지만, 취향이 한 번 생기면 그걸 단단히 붙잡고 있게 되는 것 같아. 나도 무언가를 좋아하기까지의 과정이 길고 고민도 많이 해. 애진이도 그런 것 같고. 단순하게 생겨난 것이 아님에도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의 교집합이 크다고 느껴져, 신기해.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 많지. 근데 나는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어떤 선택을 해도 있는 그대로가 받아들여지는 관계여서 가능한 것 같아. '너는 이걸 좋아했었는데 이젠 이걸 좋아하는구나'같이. 함께 영화제 다닌 거, 칵테일 마시러 다닌 거, 새벽에 은희 집에서 음악 들었던 거 생각난다. 나도 질문이 많은 사람인데, 너한테는 할 말 안 할 말 진짜 많이 했던 것 같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변하고 있어. 당연하게 친했던 친구들도 그 당연함만으로 친함을 유지하는 게 변하고 있는 것 같아. 원래 친했으니까, 으레 만나듯이 만난 아이니까, 불편하거나 상처받거나 답답해도 그냥 만났던 관계들이 있었지. 이제는 내 취향이 생기기도 하고, 성향이 바뀌기도 하면서, 사람을 존중해주고 배려해주고, 내가 좋아하는-바라보는-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그 사람도 느끼고 함께할 줄 아는 사람들이 좋은 것 같아. 그렇게 대화도 통하고, 재밌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랑 더 지내고 싶고.


사람을 이렇게 잇는 건 무엇일까?

소통과 믿음. 소통은 소통하는 순간이고, 소통하지 않는 순간은 믿음이지.

애진이가 사는 연희동에 놀러 올 때마다, 그리고 동네를 다닐 때마다 나한테 이곳저곳 알려주잖아. 그곳들을 나도 정말 좋아하게 되었어. 서울에 살게 된다면 나도 연희동에 살고 싶어.

나는 연희동이 '한적한 동네에, 친구와, 맛있는 커피' 이렇게 세 가지가 공존해서 좋아. 셋이 다 채워지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좋을 것 같아. 친구만 있어도 심심하고, 커피만 있어도 그렇고, 친구와 카페를 가더라도 시끌벅적하면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지거든.


강화도에서 나고 자랐잖아, 연희동과의 인연은 어떻게 닿게 된거야?

스무 살 때 학교 다니려고 서울에 올라왔어. 그해, 카페 알바를 했었을 때, 커피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혼자 다이어리를 쓰거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때면, 맛있는 것도 먹을겸, 커피와 공간을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카페를 찾아 합정이나 홍대 부근을 다니게 되었지. 개인 가게들이 많아서 좋았어. 그곳을 운영하는 사람의 생각이나 취향이 묻어 있는 공간을 좋아하는데, 그건 섬세할수록 좋거든. 그래서 계속 개인 카페에서 일하기도 했고. 친구랑 학교 앞에서 자취할 때도 있었고 강화에서 통학을 할 때도 있었지. 그러다가 친오빠랑 같이 살기 위해 연남동을 알아보게 되었어. 사람들이 사는 동네나 마을 이런 곳에서 살고 싶었거든. 강화에 살 때는 저 빌라에 누가 있는지 다 알고 같이 뛰어놀고 그랬지만, 서울에서는 아파트 살면서 그런 게 없었어. 그때 당시 연남동은 지금과 다르게 완전 마을이었거든. 마을 시장이 있었는데 집에서 갓 만든 잼 이런 것들 갖고 나와 팔고 계시고, 아이들도 많이 참여했는데 엄마랑 같이 돗자리 깔고 1~2년 전 까지 갖고 놀던 장난감이나 이제는 작아진 옷, 집에서 만든 브라우니 같은 것도 팔고, 뭐 하나 살면 '아 이것도 그냥 가져가세요'하고 주시고 그랬어.

개인 가게들도 많아서 골목을 돌아다니는 게 재미있었어. 그런데 어떤 문제로든 지금은 거의 다 없어졌어. 내가 살았던 집도 게스트하우스로 바뀌었고. 이런 걸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하나보다. 그러다 오빠랑 사는 게 답답해서 나오게 되었는데 갑자기 거처를 바꾸는 게 쉽지 않아서 강화에 있는 본가에 들어갔어. 그런데 서울에서 살았던 5~6년 동안의 세월이 나를 많이 바꿔놓았더라. '서울에 살고 싶어'가 아니라 내가 서울 사람이라 익숙해진 것들이 있는 거지. 강화로 돌아갔을 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들 너무 멀리 있었어. 서울에 다시 살고 싶은데, 아는 사람이 근처에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게 마포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언젠가 옆 동네였던 연희동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게 지금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


왜 연희동에 살아보고 싶었는데?

유동 인구가 많지 않은데, 어쨌든 사람 사는 동네라는 느낌이라. 곳곳에 맛있는 카페나 술집들도 많고. 세대가 다양해서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킨 곳들도 공존할 수 있고.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극적이나 눈이 즐거운 음식점이 아닌 그런 곳들이 있는 것도 반가운 일이야. 근처에 공원이 있고, 홍제천도 있고, 학교도 있고, 놀이터도 세 곳이나 있어. 역세권은 아니지만 걷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좋아. 버스로 한두 정거장을 가더라도 시끌벅적한 곳과 물리적으로 먼 게 좋았어. 연희동에도 마을 시장이 있어. 건물들이 낮아서 하늘을 볼 수 있는 것도 좋고. 강남에 살던 친구가 연희동에 작업실을 구해서 살았을 때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여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여유롭고 느리냐'고 했어. 내가 그때 '여유를 좀 가져, 저 구름도 좀 보고 얼마나 좋냐'고 했지. 그래서 구름 사진 보내면 구름 사진으로 답장하고 그랬어. 동네를 걸어 다니기만 해도 계절에 따라서 남의 집 담벼락들이 변하는 걸 보는 재미도 있어. 동네에 '작지만 큰' 마트도 있고. 그냥 나가서 밥 먹고 걷고 하면 그게 다 느껴져.


살아보니 어때?

변함없는 것들은 하염없이 변화가 없는데, 그래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오는 것 같아. 나무의 굵은 줄기는 있는데 가지들이 바뀌는 것처럼, 가지치기는 나무를 더 건강하게 하잖아. 자식들이 이어서 다른 가게를 한다든지, 다른 사람들이 이어서 다른 무언가를 한다든지, 새로운게 생긴다든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게 뭐라고 생각해?

작은 변화들은 필수적으로 찾아오잖아. 변하지 않는 건 없는 것 같고, 변하지 않기 위해서는 작은 변화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 같아. 모든 건 지금과 같을 수 없기에, 그런 변화들이 찾아올 때 잘 수용해야지 변하지 않는 것 같아. 그리고 변화 자체보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내가 중요한 것 같아.


동네에 좋아하는 곳이 있어?

친구 성환이네 집? 성환이는 대학 동기인데, 내가 저녁을 안 먹었으면 바로 옆에 사는 성환이가 밥해준다고 부르면 가서 먹고, 부담스럽고 미안하고 그런 게 아니라 고맙고 즐겁고 행복하고 그래. 그런 걸 느낄 수 있는 동네 친구가 가까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든든하고, 아는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심리적인 안정감도 있어. 내가 일하는 카페 '개인주의'도 그렇고. 손님이 없을 때는 내 작업을 할 수도 있고, 노래도 마음대로 틀 수 있잖아. 카페 '매뉴팩트'는 아침 일찍 열어. 손님들도 그 공간을 존중하는 느낌이 들고. 혼자 무엇을 하면서 커피 한 잔 하기에 부담 없는 곳이야. 커피도 맛있고. 아침에 열고 저녁 6시에 닫는데 그런 공간이 주는 어떤 활기참이 있는 것 같아. 집에서 드립 내려서 커피를 마실 수도 있지만 가끔은 그런 활기참이 필요한 것 같아. 카페 '롯지190'은 사장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는 것 같아. 커피뿐만 아니라 간단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라 조금 거리가 있어도 찾아가게 돼.


조은식

소개말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

사진 이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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