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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30 에세이

한 칸의 삶

2020.07.13 | 가만히 많이

특별히 내세울 능력이라곤 없지만 기억력만큼은 유달리 좋다고 자신하는 편입니다. 살면서 꽤 쓸모 있었던 것도 같은데, 잊혔으면 하는 일들이 쌓이다 보니 종종 애꿎이 기억력을 원망할 때도 있지요. 잊고 싶은 것은 스마트폰이 다 기억해주는 세상이니까요. 누군가와 이야기하다 보면 내가 그들보다 훨씬 더 어릴 적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엄마, 아빠와 셋이서 단칸방을 전전하던 시절이 가끔 손에 잡힐 듯이 그려질 때가 있는데, 엄마도 애꿎은 제 기억력을 원망하겠다 싶어서 굳이 그 시절 일을 입 밖에 잘 꺼내지는 않습니다.


딱 하나 없던 그것
웃을 일이 많았습니다. 이웃의 정이라는 게 있어 뭔가를 얻어먹을 일도 많았지요. 주인집 할머니는 저를 아주 귀여워했는데, 그가 구운 갈치의 가시를 발라 흰쌀밥 위에 얹어줄 때면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게 있었나 싶었던 생각이 납니다. 친구도 두 명이나 있었는데, 두세 살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우정이라는 게 생기기 전이었던 터라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무서운 것도 많았습니다. 도둑, 자동차, 뾰족한 쇳조각같이 실제로 위협이 될 만한 것들도 무서웠고 호랑이, 귀신, 갑자기 자라나는 식물처럼 그럴 필요가 없는 것들도 무서웠지요. 모든 게 있었던 그때, 제게 딱 하나 없었던 것은 화장실이었습니다.

화장실이 안에 있는 집으로 이사 간 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인데 그 때문인지 지금도 제게 부와 가난을 가름하는 척도는 화장실입니다. 외환위기가 와서 아빠가 실직했을 때도, 그 밖의 이런저런 힘든 일이 있어도 제가 가난하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지요. 화장실이 집 안에 없다는 건 단순히 귀찮고 불편한 것 이상의 공포와 수치를 동반하는 일이었습니다. 가족 외의 사람을 만나 험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씩 생리 현상을 겪을 때마다 하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였습니다. 그 때문인지 저는 지금도 굶는 일에 익숙합니다.

301호라는 새로운 이름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신림동 고시촌이었습니다. 3.5평, 침대, 에어컨, 책상, (냉동실 없는) 냉장고 옵션, 세탁실 공용.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5만 원. 엄마는 그런 곳에서 살아서 괜찮으냐고 여러 번 물어보셨지만, 그곳에서 3년을 살면서 저는 별로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나만의 방, 나만의 화장실. 그걸로 충분했으니까요. 거기서 저는 301호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한 칸의 삶으로 구획된 한 칸의 이름. 그 익명성은 제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10년 넘게 한 칸의 삶을 살았지만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301호는 608호로 다시 404호로 개명을 거듭했습니다. 그사이 방이 넓어지고 세탁기가 생겼으며 냉동실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주제도 어린 시절과 불안한 미래 사이 어딘가에서, 부동산과 금융 상품 사이 어딘가로 옮겨왔습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내가 원룸에 살고 있다는 사실뿐인 듯합니다. 그 한 칸의 삶을 벗어나는 일이 생각보다 힘들어서, 저는 전세 만기가 두 달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 집이 나가지 않아 매일매일 부동산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린 마음과 가난한 마음
정부가 스물한 번째 ‘고강도’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다는 뉴스를 들으며 지난 스무 번의 대책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의아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억력에는 자신 있는 편이거든요. 스물한 번째 대책이 급격하게 상승시킨 김포와 파주의 아파트 가격을 둘러보다가 갈치 굽는 냄새가 나면 아닌 척 툇마루에 앉아 주인집 할머니가 불러주길 기다리던 어린 마음이 생각났습니다. 집을 두세 채 가지고도 스스로 끊임없이 가난하다고 여기는 마음에 대해서도 오래 생각하게 되었고요. 한 칸 이상의 삶을 살아본 적 없는 제게는 너무 먼 이야기일까요. 그렇지만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이진혁
출판 편집자, 밴드 '선운사주지승' 멤버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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