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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41 스페셜

올해의 넷플릭스

2020.12.30 | <퀸스 갬빗>과 <더 크라운> 시즌4 속의 빛나는 여자들

영화 기자임에도 극장행을 자제해야 했던 내게 올해는, 제 버릇 남 못 주고 OTT 콘텐츠의 홍수 속으로 빠져든 해로 기억될 모양이다. 특히 해외 TV 시리즈의 트렌드에 둔감했던 드라마 초심자로서 잘 만든 시리즈물의 세계에 입문하면 꼼짝없이 인생의 시간을 뭉텅이째 상납하게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은둔을 강제한 2020년, 엄혹한 날들 가운데서도 아직 인간에겐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고, 심지어 그것이 줄지어 쏟아진다고 생각하면 묘한 위안마저 찾아왔다. 한 해를 돌아보며, 플레이 버튼을 누르길 참 잘했다 싶은 드라마들 중 넷플릭스 오리지널 두 편을 추려 매력을 되짚었다. 내 저녁 시간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들, <퀸스 갬빗>과 <더 크라운> 시즌4의 특별한 감흥을 소개한다.

<퀸스 갬빗>

<퀸스 갬빗>: 여자들의 중독
1950년대, 천재적인 여성 캐릭터, 그리고 고풍스럽게 스타일링한 배우 안야 테일러 조이. 몇 가지 눈에 띄는 단서들로 유추해본 <퀸스 갬빗>은 첫눈에 끌리는 드라마는 아니었다. 천재의 성공 신화란 제아무리 독창적이어도 결국은 비슷하다는 통념 때문이었다. 비상한 실력을 지닌 여성 체스 플레이어 엘리자베스 하먼(안야 테일러 조이)의 “긍지와 비애”로 향하는 <퀸스 갬빗>은 그늘진 시간을 술과 약물로 채우며 예상치 못한 틈새 전략을 펼쳐 보인다. 이 파괴적 정념의 중심엔 미국 사회의 약물 오남용, 그중에서도 변방에 자리한 여성들의 중독이 자리하고 있다. 천재의 재능 이전에 여성의 우울과 고독으로부터 똬리를 튼 이야기에서, 주인공 베스는 유년기의 불안을 고아원에서 배급받은 안정제로 잠재우고 그녀를 입양한 휘틀러(마리엘 헬러) 부인은 피아니스트의 꿈을 대신할 유일한 자발적 선택지로 키친드렁커의 삶을 산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1950년대 남성들이 유예된 아메리칸드림을 수혈받는 동안, 밝고 상냥한 소녀에서 완벽한 아내로 이행한 여성들은 보상적 존재 바깥의 자기를 드러낼 창구가 없음에 뒤늦게 절망한다. 남다른 체스 실력으로 예외적인 자유를 거머쥐게 된 베스조차 여성의 생애에서 은밀하고 유구하게 자행되어온 조용한 중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학창 시절 베스를 은근히 괴롭히던 동급생이 어느 날 유모차 아래 술병을 가득 실은 채 나타나는 장면에서, 베스가 느끼는 건 연민도 승리감도 아닌 애매한 동질감이다. 위태로운 1등의 첨탑에서 약물에 허덕이든, 커튼 친 부엌과 침실에서 몰래 술을 마시든 견디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끝없이 늘어선 시간과 공허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위태롭다지만, 성별(과 나이)이 불러낸 좌절감마저 반복 학습하는 경우라면 그 심리적 수렁은 끝 모를 깊이로 심연을 향한다.

드렁커들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능한 <퀸스 갬빗>이 흥미로운 지점은 인물들이 끝내 고기능성 중독자의 면모를 유지하면서(!) 결코 추락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천재의 자아도취와 그로 말미암은 자기 파괴적행위는 그동안 얼마나 무수한 서사들에서 사회적 민폐로 귀결되었던가. 나는 아직도 <스타 이즈 본>(2018)의 그래미 시상식 무대에 올라간 브래들리 쿠퍼가 자기 바지를 적시던 장면의 나르시시즘을 잊지 못한다. 테이블 위를 한번 대차게 엎지르고 주먹이라도 휘둘러야 천재성의 폭주가 멈추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퀸스 갬빗>은 우울과 중독의 상태를 직시하면서도 인물을 괜한 궁지에 몰아넣지 않고, 여성 주인공이 언젠가 지나친 고초를 겪고 말 거라는 불안 앞에서 유유히 함정을 피해 간다. 베스는 무절제하게 밤을 지새우고도 대국 시간에 맞춰 뛰쳐나간다. 휘틀러 부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술을 끝까지 즐겁게 마시다가 떠난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순간에, 이런 모든 근심으로부터 자기를 단단히 지켜낸 또 다른 여자(졸린)가 등장해 베스에게 연대의 손을 내민다. 남성형 서사에 여성이 진입했을 때의 기묘한 반전들을 품은 <퀸스 갬빗>은 요컨대 비틀거리는 여자들의 ‘체크 메이트’ 스토리라 할 만하다. 조금 더 건강하거나 혹은 조금 더 취약한 채로, 그들은 어쨌든 자기 진로를 거침없이 개척해 판도를 뒤집는다.

<더 크라운>

<더 크라운> 시즌4: 걸작의 탄생
아직도 흥분을 완전히 가다듬지 못한 채로 결론부터 고백하자면, 시즌4부터 보아도 좋다. 충분히 좋다. <더 크라운>은 1952년에 스물여섯의 나이로 즉위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일대기를 다루는 시대극 시리즈다. 처음부터 시즌6 정도의 분량을 내다보고 시작된 <더 크라운>의 얼굴은 배우 클레어 포이에서 올리비어 콜먼으로 우아하게 나이 들어갔고 여왕의 생애와 함께 드라마의 밀도도 무르익는 낌새를 보이더니 시즌4에서 일을 냈다. 이번 시즌의 주인공은 배우 질리언 앤더슨이 연기하는 마가렛 대처 총리다. 1975년에 마가렛 대처가 취임하는 것으로 1화의 문을 열어 그가 퇴임한 1990년으로 문을 닫으며, 10개 에피소드 만에 15년간의 굵직한 역사적 순간들을 에피소드별로 깔끔하게 압축해내는 구성력이 압권이다. 왕관의 무게와 여성으로서의 동지애를 은근히 공유하는 엘리자베스 여왕, 대처 총리의 만남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둘만의 비밀 접견 신을 통해 느와르와 페미니즘 드라마를 오가는 스릴을 피워낸다. 막강한 두 여자의 힘겨루기도 모자라 시즌4에는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또 다른 타이틀 롤로 나섰다. 신인 배우 엠마 코린은 풍성한 숏컷의 헤어스타일부터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고 조용히 웃는 특유의 내성적인 미소까지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영리하게 캐리커처하는 데 성공했다.

<더 크라운> 시즌4는 매 에피소드 힘 있고 굵직하게 새로운 이야기를 환하게 불 밝히는데, 여왕과 총리가 팽팽하게 서로의 방식대로 상대를 탐색하는 초반부와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일으킨 일대 파란을 소개하는 초반부가 지나면 시즌4의 본심이 드러난다. 여왕의 침실에 생활고에 시달리는 노동자가 난입하면서 벌어지는 5화는 올해 왓챠 익스클루시브로 공개된 또 다른 명작 <이어즈&이어즈>에서 그려낸 디스토피아의 본령이 어디인지 선연히 가리킨다. 영국 사회파 리얼리즘의 거장 켄 로치 감독의 시선과 태도를 일부 흡수한 이 두 영국 드라마가 각각 과거와 미래에서 브렉시트를 근심하고 있음은 두말 할 나위 없다. 1980년대 영국 정치사의 격동을 비추는 시즌4의 연출은 이렇게 종종 주인공들로부터 가장 먼발치에 사는 인물들에게 이야기를 할애함으로써 궁정과 내각의 로열패밀리들이 ‘그들만의 리그’에 살고 있음을 적시하길 즐긴다. 여전히 영국사의 가장 열렬한 정치적 논쟁 중 하나인 대처리즘에 대한 평가에 미온적인 것은 사실이나, 그런 유보적 태도를 극 중 캐릭터의 입체성이라는 픽션만의 가치 아래 영리하게 잘 숨긴 것도 만족스럽다.

엘리자베스와 마가렛, 다이애나가 맞붙는 시즌4에서 대처는 여성 총리로서의 내면적 모순과 허황까지 날카롭게 껴안은 인물이다. 여왕과의 첫 만남에서 가정보다 일을 우선할 것임을 나서서 어필하고, (자신을 제외한) 여성은 감정적이라 장관급으로는 채용하지 않겠다던 대처는, 퇴근 후 신문 보는 남편 옆에서 셔츠를 다림질한다. 불도저 같은 자유시장경제로의 개혁 때문에 민심을 잃었을 때에도 눈 하나 깜짝 않던 철의 여인은 그 와중에 내각 인사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앞치마를 매고 밥을 지어 먹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녀가 스스로 자처한 이 기이한 역할극은 큰아들이 실종된 후 여왕과의 정무 회의에서 덜컥 눈물부터 쏟는 모습으로 진가를 드러낸다. ‘여성 총리’인데 눈물까지 쏟았다며 재빨리 자책하는 대처에게 여왕은 재빨리 심려의 기색을 거두고 “내 앞에서 눈물을 쏟은 총리는 절대 당신이 처음이 아니랍니다.”고 화답한다. 올리비아 콜먼의 예의 수줍은 미소와 함께 대처에게 티슈와 위스키를 건네는 여왕은 어쩐지 지금 누구보다도 대처를 잘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아는 듯하다. 웰컴 투 더 크라운. 왕관의 무게를 견딜 자들의 연대는 그렇게 이상한 순간에 피어난다.


김소미(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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