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적이던 책 속에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멋진 문장을 만날 때, 내 관점을 가차 없이 전복시키는 글의 힘을 경험할 때, 우리의 일상에는 작은 실금들이 간다. 하나의 세계가 부서지고 새로운 세계가 들어서는 시간. 빼곡한 책들 사이로 크고 작은 균열의 소리가 들린다. 여기는 홍대 앞 작은 골목 안 ‘wrm 레퍼런스룸’. '

읽지도 않으면서 책을 마구 사 모으는 내 모습을 한동안 자책하던 시절이 있었다. 첫 장도 안 넘긴 매끈한 새 책들이 쌓일수록 ‘저 책들을 읽어야 하는데.’라는 마음속 부채감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독서가 의무로 여겨지던 순간들. 그럴수록 책과는 더 데면데면해졌다. 하지만 이제 안다. 한없이 심심한 어느 날 오후, 내 취향으로 채워진 책장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유난히 마음이 향하는 책 한 권을 꺼내 들면 그만이라는 것을. 운이 좋으면 그 책 속에서 쩡 하고 기존의 세계가 깨지는 순간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다람쥐가 부지런히 도토리를 모으듯 나는 내 취향의 책들로 빽빽한 책장 사이를 메우고 또 메운다.
나만 알고 싶은 아지트, 홍대 앞 레퍼런스룸

누군가의 책장은 그 사람의 사유 체계와 영감의 계기들을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 공간을 무심하게 채운 저 책들은 어떤 사유 체계와 취향을 반영한 결과일까. 홍대 앞 작은 골목 안에 자리 잡은 ‘레퍼런스룸’은 디자이너들에게는 ‘wrm(whatreallymatters 왓리얼리매터스, 이하 wrm)’이라는 브랜드명으로 더 익숙한 마포디자인·출판지원센터의 자료실이다. wrm은 지금 홍대 앞 디자인 출판문화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고민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생각을 주체적으로 펼쳐 보일 가능성을 열어준다. 공간 대관, 우수콘텐츠 지원사업 등의 물리적 지원뿐 아니라 자문 및 컨설팅, 레퍼런스룸 운영 등 생각을 자라게 하고, 아이디어의 시작점을 만드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해왔다. 동시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을 섭외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열기도 하는데 감도 높은 기획과 공간 구성으로 디자인이나 출판 관련 사람들에게는 야금야금 입소문을 탔다. 서울시가 지원하는 wrm은 2018년 정식 오픈 후 지금까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만 알고 싶은 공간’으로 여겨지는 그런 곳이다.
능동에서 출발한 몰입의 순간

내가 레퍼런스룸을 애정하게 된 건 코로나19 때문에 예약제로 바뀌면서부터다. 예약제가 만들어낸 사적인 공간의 분위기는 온전히 읽고, 생각하는 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가림막, 동선 설계, 의자 등의 가구 배치들도 몰입의 순간을 도왔다. 관심 분야의 서가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뒤적이는 시간은 독서의 예열 과정으로 작용했는데, 레퍼런스룸에 처음 갔을 때 그 준비 과정(내가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시간)이 내 일상에서 사라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터넷 서점에서야 목적한 책을 검색한 후 장바구니에 담으면 그뿐. 그마저도 누군가 추천하는 책이거나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분류된 것들이 많았다. ‘읽어야 하는 책’과 ‘읽고 싶은 책’은 독서의 과정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데려가는데 말이다. 능동적으로 내가 읽고 싶은 책, 꽂히는 문장을 발견하는 일은 독서 몰입의 가장 큰 전제다. 만약 요즘 도통 책이 안 읽힌다면 ‘읽어야 하는 책’ 또는 ‘읽고 있다고 타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만 붙잡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여하튼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레퍼런스룸에서 나는 목적 없이 각 장르의 책들을 넘나들며 문장들, 사진들, 이야기들을 마주했다. 전에 읽었을 때는 계속 겉도는 느낌을 받은 책들도 이곳에서는 신기하게도 술술 잘만 읽혔다. 뭐 그게 꼭 환경의 문제만은 아니었겠지만.
책들 너머로 영감을 주고받는 공간

레퍼런스룸에는 총 2천여 권의 알토란 같은 책들이 모여 있다. 그래픽과 타이포그래피, 편집디자인, 사진 등의 시각문화뿐 아니라 출판문화, 인문학 분야, 소설과 에세이 등 문학 분야까지 총 15개의 코드로 구분해 서가를 구성했다. 이 책들은 총 세 명의 wrm 기획자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엄선한 결과. 오랫동안 가치를 이어갈 만한 책들을 우선했다. 책뿐 아니라 종이 샘플, 팬톤 컬러 칩 등 디자인 실무에서 참고할 만한 자료들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다. wrm 레퍼런스룸의 대표 프로그램인 ‘릴레이 서재’는 작업자 한 명을 선정해 그가 선별한 책의 목록으로 서가를 꾸리고 토크를 이어가는 기획이다. 현재까지 슬기와 민, 초타원형, 현시원 큐레이터의 책장이 레퍼런스룸에 이양됐다. 김린 교수를 연사로 초빙해 페미니즘 책장에서 필요한 도서를 추천받은 ‘책장 동기화하기’ 연계 워크숍도 흥미로운 기획이다.
책들 너머로 영감을 주고받는 wrm 레퍼런스룸은 도서 열람이나 개인 작업 등 자료와 공간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웹사이트(wrmatters.kr)를 통해 예약 후 이용 가능하다. 예약 현황에 따라 최대 네 시간까지 이용할 수 있어 책 한 권 완독도 충분히 가능. 소장 도서는 웹사이트의 Archives에서 열람할 수 있다. 하지만 읽을 책을 특정하고 가기보다는 관심 분야의 서가에서 이리저리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는 예열 과정을 거치기를 권한다. 함께 놀 친구를 고른다는 마음으로.
400페이지 책 한 권을 단 10분 만에 요약한 영상들이 독서를 대체하기도 하는 요즘.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책 한 권의 에센스를 다 소화한 듯한 느낌이 들지만 그 기억은 하루만 지나도 금세 휘발된다. 책과 스스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다. 책은 내 마음속의 언 바다를 깨는 도끼와도 같다고. 얼어붙은 바다가 다시 출렁이는 순간, 우리는 조금 더 선명하고 정교한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다. wrm 레퍼런스룸, 내 방 책상 위, 공원의 벤치, 지하철 안, 그 어디에서든.
글. 김선미
사진. 양경필·김진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