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서점에서 산 영화 잡지 <키노(KINO)> 1998년 4월호를 ‘3회독’했다. ‘회독’은 보통 수험생들이 문제집 등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공부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페이지 할애의 차이는 있지만, 각각의 글이 같은 크기로 소개된 목차는 마트에 진열된 비슷한 가격대의 샴푸들 같다.
같은 잡지를 ‘회독’할 때 나는 종종 콘셉트를 정한다. 전체를 꼼꼼히 보는 게 아니라서 학습적 측면의 회독과는 거리가 있지만, 같은 잡지를 여러 번 읽기에 회독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타이포그래피만 보는 날도 있고 한국인만 나온 페이지를 보기도 한다. 또 며칠 뒤에 영화 스틸컷만, 한 달 뒤에는 경어체로 작성된 인터뷰 글만 읽는 식이다. 청소와 새 샴푸 못지않게 변화가 필요할 때 활력소가 된다.
잡지를 또 훑다가, SNS에서 우연히 본 누군가의 취향이 생각났다. “소설에선 얻을 게 없어서 읽지 않는다.” 정보나 지식을 주는 게 아닌데 소설(로 통칭되는 에세이, 시 등)을 왜 읽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마디로 ‘비문학’이 아니면 ‘비효율적’ 텍스트라는 뜻이다. 문득 그가 비문학에서 얻은 지식과 ‘샴푸통’들이 궁금해졌다. 영화나 음악은 어떻게 감상하는지, 뉴스를 볼 때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부가 늘어나도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다. 사실 우리는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더 열심히 모은다. 때까치는 분명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늘 불안에 시달리는 때까치가 더 많은 먹이꽂이를 소유할 것이다. 체외 자원 축적이라는 독특한 행동 전략은 분명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었지만, 그 대가로 불행을 선물했다. 흥미롭게도 파국적 미래를 준비하는 프래퍼, 생존주의 문화는 세계 제일의 부자 나라인 미국에서 가장 발달해있다.’(박한선, ‘모으고 모아도 우리가 늘 불안한 이유”, <스켑틱> 30호 중)
어떤 균형을 위해 문학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잊을 만하면 어릴 때 읽은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몇 장면이 떠오른다. 찢어진 머리에 지혈제가 엉겨 붙은 채 본드를 흡입한 명환, 아이들을 위해 수중의 돈을 털어 ‘치즈피자’를 주문하는 영호, 반질반질해진 벽에 기대 잠들 때까지 TV를 보는 동준. 그다지 우아한 반박은 아니지만 ‘비문학’에도 허무는 있고, 소설에도 ‘정보’는 있다. 비효율적 텍스트의 비효율적 회독이 늘 재밌길 바란다.
글. 황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