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운튼 애비 2> 스틸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패러소셜 브레이크업(Parasocial Breakups)이라는 용어가 있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준사회적(상호작용) 이별’이라고 할 수 있다. 준사회적 상호작용은 일방적인 관계를 뜻하는 것으로 우리가 직접 알지는 못하는 유명인이나 드라마 등의 캐릭터에 감정적 친밀감을 느끼는 경우를 일컫는다. 즉, 준사회적 이별은 드라마 속 인물이 죽었을 때 혹은 오랫동안 방영해온 시즌제 드라마가 취소되거나 막을 내릴 때 시청자들이 느끼는 상실감을 뜻한다.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사랑받은 시트콤 시리즈 <프렌즈>가 막을 내렸을 때 이런 준사회적 이별에서 온 상실감을 호소한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는 실제로 가까운 사람을 잃었을 때에 준하는 감정이다.
2022년에 개봉해 최근 넷플릭스에 업데이트된 <다운튼 애비 2(Downton Abbey: A New Era)>는 이런 준사회적 이별을 좀 더 수월하게 맞을 수 있도록 돕는 작품이다. 2010년 영국 ITV에서 방영된 이후 여섯 개 시즌과 두 편의 영화에 이르는 동안 선풍적 인기를 끈 이 장중한 시대극 시리즈의 결말에 해당한다. 영국 계급주의를 풍자한 영화 <고스포드 파크>(2002)의 작가로 유명한 줄리언 펠로우즈는 다시 한번 자신의 장기를 발휘해 1910년대의 영국 요크셔의 거대한 장원 ‘다운튼 애비’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다운튼 애비>는 화려한 의상과 광활한 스케일로 시청자를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고스포드 파크>에 드러난 귀족계급과 하인으로 대변되는 노동계급의 캐릭터 대비를 극명하게 그려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국의 시청자는 물론 대서양을 넘어 미국의 시청자까지 사로잡은 <다운튼 애비>의 특징은 소프오페라적 선정성이었다. 유산상속, 결혼을 둘러싼 구애, 순결한 백작가의 영애와 이국 귀족의 밀회, 침실에서 맞은 갑작스러운 죽음, 하인들의 비밀과 음모, 전쟁에 이르기까지 온갖 극적인 사건이 펼쳐지며 시청자들을 100년 전 세상으로 끌어들었다.
<다운튼 애비>의 주인공들은 영국의 그랜섬 백작가다. 7대 그랜섬 백작인 로버트 크로울리(휴 보네빌)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미국인 아내 코라 크로울리(엘리자베스 맥거번)는 세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지만 그들에게는 남성 상속자가 없다는 걱정거리가 있다. 영국의 한사상속 습속에 따라 백작 사망 후에는 가장 가까운 남성 친족에게 작위와 재산이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제를 해소하려면 큰딸 메리(미셸 도커리)가 현재 상속자인 매튜 윌리엄스(댄 스티븐스)와 결혼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메리는 이런 입장 때문에 매튜를 경계한다. 이런 감정적 동요 속에서 다운튼 애비는 예기치 못한 운명으로 향한다.
<다운튼 애비> 시리즈가 1912년부터 1928년에 이르는 시대를 다루는 사이에 많은 인물이 드라마에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시즌 2의 엔딩에서는 극의 주요 인물이 드라마를 갑자기 떠났고, 그 후에 다른 인물이 그 자리를 대치하며 다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그랜섬 백작의 세 딸은 각자 개성대로 삶을 개척해갔고, 하인들 또한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한다. 이들의 인생을 함께하며 그 시간을 보낸 시청자들은 마치 현실의 인물처럼 극 중 캐릭터들에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충분히 좋은 이별

ⓒ <다운튼 애비 2> 스틸
<다운튼 애비>가 처음 영화로 만들어진 2019년 이후, 3년 만에 나온 <다운튼 애비 2>에서는 한 명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캐스트가 그대로 돌아왔다. 영화는 두 가지 사건으로 시작한다. 하나는 그랜섬 백작의 어머니인 대부인 바이올렛 크로울리(매기 스미스)가 과거에 인연을 맺은 프랑스인 후작에게 프랑스 남부에 있는 빌라를 상속받은 일이다. 로버트는 갑작스러운 사건에 놀라는 한편 어머니와 후작의 관계에 의구심을 품는다. 또 다른 사건은 다운튼 애비에서 일어나는 영화 촬영이다. 메리는 장원의 보수와 운영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할리우드의 제작사에 다운튼 애비를 촬영장으로 대여하고, 배우와 스태프들이 불러온 활기에 다운튼 애비의 식구들이 들뜬다.
많은 서사시가 그러하듯 <다운튼 애비 2>는 결혼식으로 시작해 장례식으로 끝난다. 누군가는 새로운 인생의 단계를 시작하며, 누군가는 오래 이어온 삶을 마친다. 이 영화의 부제 ‘새로운 시대’가 의미하는 바도 여기에 있다. 이제 과거 귀족과 하인으로 나뉘던 시대는 끝나고,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현대로 접어드는 시점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시대의 변화는 필연적이고, 아무리 사랑했던 사람들이라도 각자의 길을 간다.
<다운튼 애비> 같은 시대극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분명히 모순적인 지점이 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평등한 계급을 지향하는 사회에 사는 현대인은 귀족계급의 화려한 면모에 끌린다. 장엄한 장원과 풍광 좋은 별장, 승마나 폴로 같은 고급 취미, 아름다운 의상, 육체노동 없는 편안한 삶. 하지만 그 뒤에는 하인들의 고충이 있고, 서민의 삶이 있다. 우리는 노동계급과 더 가깝지만, 과거를 회상할 때는 늘 지배계급의 광휘만 떠올리기 마련이다. 우리 마음속의 보수성과 속물성을 자극한 것이 <다운튼 애비>의 인기 요인이지만, 한편으로는 계급을 초월하는 보편의 드라마에 빠진 것도 사실이다. 탄생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오고, 필연적 몰락과 그 상황에서 일어나는 의지가 있다.

ⓒ <다운튼 애비 2> 스틸
이처럼 대체로 현실적인 시리즈지만 <다운튼 애비 2>의 결말은 살짝 동화적이다. 모두가 큰 비극 없이 원하던 것을 갖는다. 가족, 오랜 꿈의 실현, 자신의 정체성에 충실한 삶, 그리고 평화로운 결말. 순진하지만 이제까지 이들을 애정으로 지켜봐온 시청자들이 원하는 해결이었으리라. 시청자는 허구의 인물들이 그 가상의 세계에서 편안하게 살기를 바란다. 아직 <다운튼 애비>가 확실히 결말지어진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 로버트 크로울리 역을 맡은 휴 보네빌은 “끝내기에 좋은 방식.”이라는 코멘트로 이 작품이 마지막일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설사 다시 이어지더라도 이제 <다운튼 애비>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삶에서 어떤 마디를 찾는 방식이다. 삶은 끝날 때까지는 끝이 아니지만, 어느 시점에 이제 더는 예전 같지 않으며 새로운 시대를 연다. 그렇게 과거를 두고 앞으로 나아간다. 약간은 쓸쓸해도 너무 슬프지 않게. 그것으로 좋은 이별이다.
* <다운튼 애비> 드라마 시즌 6은 왓챠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서 제공하며, <다운튼 애비> 영화는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구입할 수 있다.
글. 박현주
이미지. <다운튼 애비 2> 스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