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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90 에세이

동네에 건네는 인사 ― 잘 가, (2)

2023.01.12


이 글은 '동네에 건네는 인사 ― 잘 가, (1)'에서 이어집니다.

고척동 152-22번지의 의미

창문 아래에는 김찬민 학생이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김찬민 학생은 하나둘 사라질 풍경을 그려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감정이 고스란히 그림에 담기긴 했지만, 보는 내내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는 또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며, 고척동이라는 동네와 지역에 대한 어떤 마음이었을까? 30년이라는 세월과 3대가 살았던 곳이 재개발로 없어진다고 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궁금했다. 생각 외로 덤덤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재개발이 아니었다면, 계속 머물렀을지도 몰랐을 곳인 고척동 1522–22번지. 그래도 김찬민 학생과 할머니는 운이 좋았다. 자신이 살아온 동네를 기억할 수 있게 찬찬히 돌아보며 그림을 그리고, 구술과 공연을 진행함으로써 동네에 나름의 이별을 고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 여기도 끝인데 그리우면 이 골목 찾아와 아저씨 떠올리고 그러면 좋겠는디."

공연 <, 김공남> 대사

동네에 찾아온 새로운 생태계를 보며

"판교가 개발되기 시작하자 이 골목은 요란한 부동산 간판으로 뒤덮였다. 한국의 어느 길거리나 간판이 요란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 길거리에서 특이한 점이라면 지금은 이 거리 자체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판교가 개발되면서 이 사진에 나오는 모든 건물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 큰 도로가 뚫렸는데, 다시 그 자리를 찾아가서 전과 후를 비교하는 사진을 찍어 보려 했으나 지형이 완전히 변해서 이 사진을 찍은 지점이 어디쯤인지 도저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하나의 상태가 다른 어떤 상태로 변하는 전환이 아니라 코끼리가 아르헨티나로 변하는 것 같은, 완전히 범주가 다른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아마 이 뒤바뀜을 설명하려면 ‘meta’와 ‘trans’가 한참 뒤엉킨 단어를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이영준 글, <초조한 도시>, 안그라픽스, 2010, 59쪽.

9개월이 흘렀다. 고척동 152–22번지는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 철거되지 않은 빈집이 남아 있어 과거의 풍경을 살필 수 있지만, 언제,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시간이 없다. 나는 어떤 안녕을 고할 수 있을까? 또다시 발걸음이 빨라진다.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샛길로 나와버렸다. 비슷한 풍경을 하고 있던 건너편 동네는 재개발이 끝나 아파트가 들어섰다. 한산했던 거리가 사람들로 북적인다. 없던 신호등이 생겼다. 길이 넓어졌고, 그 길을 이용하는 차량도 늘었다. 아파트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구상가가 위치해 있다. 상가 쪽에서 걷고 있으니 담벼락 너머 아이들의 말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직 멈춰 있는 고척동 1522–22번지의 미래가 상상되었다. 재개발을 통해 변화가 찾아온 동네라면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비슷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현실에 대해 대화나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무언가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현상을 개인의 의지로 선택한 것으로 여겼던 지점도 있었다. 예를 들면 동네에 있던 오래된 가게가 사라지고, 새로운 가게가 영업을 시작했을 때 ‘장사가 잘 안 되는 건가?’, ‘사장님에게 개인 사정이 있겠지’라고 추측했던 것처럼. 하지만 재개발이나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한 임대료 상승 등의 외부 요인도 작용한다. 외부인이 이런 사실까지 알기란 쉽지 않다. 그것을 실감하는 날은 아마도 동네에 새로운 생태계가 형성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생각한다. 지난날 시간과 추억을 온전히 쏟아부은 모든 장소와 사람들에게 미처 안녕을 고하지 못함에 대해서 말이다.

‘좀 더 많이 가볼걸, 좀 자세히 봐둘걸. 몇 마디 더 나눠볼 걸, 인사라도 제대로 할걸.’ 아쉬운 나날이 가득한 날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곧 사라질 동네가 있다면 작별인사를 준비해 안녕을 고해보는 건 어떨까?


글 | 사진. 이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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