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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97 에세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품위를 지켜내는 비폭력 언어 (2)

2023.04.18

이 글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품위를 지켜내는 비폭력 언어 (1)'에서 이어집니다.

그 말을 통해 진정 원하는 게 뭔지를 먼저 생각하기

일본인이지만 영국으로 건너가 보육사로 일한 경험을 담은 브래디 미카코의 책 <아이들의 계급투쟁>(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사계절, 2019)을 보면 이런 일화가 나와요. 한 살짜리 데이지는 어린이집에서 말끝마다 퍽(Fuck)을 연발합니다. 심지어 F 발음이 아직 어려운지라 선생님이 말을 걸 때마다 ‘억 유’ ‘어킹 유’ 같은 식으로 말해요. 겨우 한 살짜리가요. 브래디 미카코는 데이지의 부모가 서로 대화를 할 때 절반 이상이 ‘퍽’ 아니면 ‘퍼킹’으로 이루어져 있는 걸 목격합니다. 이런 부모와 종일 있으니 데이지가 처음으로 한 말이 ‘퍽’인 것도 놀랍지 않죠. 데이지 같은 경험을 하는 아이들 뇌가 그렇지 않은 환경 속 아이들의 뇌와 비슷한 게 어쩌면 더 놀라운 일일 겁니다.

제 부모님은 악인이 아니에요. 기댈 곳이 없고, 돈이 없고,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고, 그 와중에 아이들은 셋이나 되니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뿐이죠. 자꾸 날카로워져서 서로 탓하게 되고 그러다 습관적으로 싸움을 하게 되는 부부. 동물도 그렇잖아요. 비좁은 케이지에 사육하는 닭이 늘어나면 서로 공격하다 그중 제일 약한 놈부터 바닥에 깔려 죽는다더군요. 저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눈총을 받았습니다. “너만 없어도 덜 힘들 텐데.” 같은 푸념을 자주 들었어요. 자라는 내내 탄생설화처럼 반복해 들은 이야기가 “죽으라고 젖도 안 주고 이불을 푹 덮어뒀는데 끝내 안 죽어서 어쩔 수 없이 키웠다.”는 내용이 조금씩 변주된 내용이었죠.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사실인지 농담인지는 모르죠. 문제는 그런 이야기를 자꾸만 듣다 보니 울분과 뾰족함이 커져 수시로 삐져나오게 된 거예요.

책을 도피처로 삼은 후 저조한 학습 능력 문제는 해결이 되어갔어요. 어차피 친구가 없고 학원에도 가지 않으니 남는 건 시간뿐이었거든요. 도서관에서 종일 책을 파다 보니 국어 성적이 먼저 올랐고 자연스럽게 사회나 영어 같은 성적도 따라 올라갔죠. 중학교 이후로는 성적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를 가장 오랫동안 괴롭혀온 부분은 분노가 일 때 비아냥거리고 싶은 걸 참는 일이에요. 더 날카로운 표현을 찾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턱이 얼얼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꾸준히 노력합니다. 암이나 당뇨 등 가족력이 있다면 더욱 건강에 신경 쓸 필요가 있는 것처럼, 분노의 말을 다듬는 건 제가 평생 안고 가야 하는 약점이라 생각해요.

돌이켜보면 부모와 다른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가 20대에 했던 거의 모든 행동의 원동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상처 주지 않고 말하는 법에 대한 책을 많이 찾아 읽었습니다. 매일 도서관에 들러 심리학과 화법 분야에 있는 책을 꽂혀 있는 순서대로 독파해나갔을 정도니까요. 그때 읽은 책 중 가장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바로 <비폭력대화>(마셜 B. 로젠버그 지음, 캐서린 한 옮김, 한국NVC센터, 2004)입니다. 잘 보이는 곳에 두고 한 번씩 페이지를 넘겨보곤 해요. 원제는 ‘Nonviolent Communication.’ 줄여서 NVC라고도 부릅니다. 이 책은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도 품위를 유지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대화법에 대해 설명합니다. 책을 교과서 삼아 습관적으로 타인의 말에 반응하는 대신, 잠깐 멈추고 제 상태부터 관찰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의식해보고 ‘더 세고 날카롭게’ 표현하는 게 아니라 ‘부드럽지만 정확하게’ 표현하는 연습을 해나갔죠.

ⓒ 일러스트. 최산호

폭력적인 상황을 유도하는 대화는 따로 있다

비폭력대화의 시작은 어떤 상황에서든 실제 일어나는 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겁니다.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판단이나 평가를 미루고 관찰한 바에 대해서만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사람들은 화가 날수록 자기가 그 태도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를 강조합니다. 매번 지각을 하는 사람에게 “넌 상습적으로 날 무시하는 인간이야.”라고 하거나, 약속을 잊어버린 사람에게 “넌 항상 그런 식이야.”라고 공격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를 객관적인 상황으로 표현하기만 해도 분노의 강도가 한결 뚝 떨어지게 됩니다.

다음으로는 그 행동을 보았을 때 어떻게 느껴지는지 나의 마음에 대해서만 말하는 겁니다. 마음이 아프다거나 두렵다거나 서러웠다거나 속상하다는 느낌에만 충실하면 됩니다. “술만 처먹으면 연락도 안 되고 뭐 하는 짓이야?”가 아니라, “당신이 어제 술자리에 간다고 한 뒤 연락이 안 되길래 너무 걱정이 되고 불안해서 잠을 못 잤어.”라고 표현하는 것이죠.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이 알아차린 이 느낌이 내면의 어떤 욕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히는 겁니다. 화를 낼 때 많은 이들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모릅니다. 그것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짜증을 내는 경우가 많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기 전까지 스스로 구체적인 결론에 도착해 있어야 합니다. “너는 왜 그렇게 더럽게 사니?”라고 하는 게 아니라 “집에 들어오면 정돈이 좀 되어 있으면 좋겠어. 피곤한 상태로 집에 왔는데 집이 어질러져 있으면 그걸 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게 되더라고. 집은 온전히 쉬는 공간이기를 바라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라고 개선을 위한 대안 위주로 말해야 합니다.

비폭력대화의 핵심을 정리하면, 객관적으로 상황을 관찰한 뒤 자기가 받은 느낌을 들여다보고, 상대에게 표현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요청하는 것입니다. 일례로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너는 방구석이 왜 이렇게 엉망이니? 돼지우리가 따로 없다. 방은 그 꼬라지로 해놓고 얼굴만 반질반질 씻고 다니는 거 여자 친구도 아니? 네 방만 보면 아주 그냥 짜증이 나서 돌아버리겠다.” 이 말을 비폭력대화 방식을 사용해 바꿔보죠. “일주일째 양말과 속옷이 네 방바닥에 어질러져 있네. 당연히 엄마가 다 치워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속상해. 네 방은 네가 치우기로 전에 약속했던 거 기억하지? 앞으로는 최소한 빨랫감만이라도 세탁실에 넣어두면 좋겠다.”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이 같은 정보를 넣어 상대에게 말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분노의 증폭기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됩니다. 말꼬리를 잡게 될 일이 없기 때문이죠. 말싸움을 하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애초 시작된 메시지 자체보다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태도에 빈정이 상해 감정적으로 되받아치다 화르르 분노의 화염에 휩싸이는 게 대부분입니다. 또한 비폭력대화의 언어로 말하는 연습이 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타인이 거칠게 말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욕구를 읽게 됩니다. 자기 의사를 부드럽게 표현하는 한편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우며 대화의 흐름을 이어나가기가 수월해지는 거예요. ‘저 사람은 사실 이걸 해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데 그걸 제대로 못 해서 거칠게만 표현하고 있구나.’라고 속내 파악이 되거든요. 상대에 대한 연민이 생겨나기에 최소한 함께 손을 잡고 더 낮은 곳으로 추락하지는 않게 됩니다. 물론 그같이 대처를 했는데도 상대가 막무가내로 굴면 입을 다물고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고요.

비폭력대화의 언어로 부모에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번번이 저는 실패합니다. 딱히 실망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부모님은 바뀌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애초에 부모님을 바꾸는 건 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목표는 제가 바뀌는 것뿐이에요. 그것만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연애와 결혼까지 10년을 함께한 남편과 거의 싸워본 적 없다는 게 증거 중 하나입니다. 부부가 서로 상처 주지 않고 지내는 게 가능하다는 걸 삶에서 직접 목격 중이죠. 제가 선택할 수 있던 유일한 가족에게만은 실패하지 않을 거예요. 싸울 때조차 상대를 존중하는 법, 상대와 나의 존엄을 지키면서 우아하게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는 법은 누구나 배우고 익혀서 써먹을 수 있는 교양입니다. 다정한 말이 어색한 사람일수록, 말로 상처받은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사람일수록, 잘 아는 뾰족함을 뛰어넘어 직접 꾸며낸 자립의 공간에서 편안해지기를 바랍니다. 그곳은 유전자나 재능이나 운 같은 게 필요 없는 귀하고 폭신한 세계니까요.

  • 소개

정문정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더 좋은 곳으로 가자>를 썼습니다. 유튜브 채널 <정문정답>을 진행합니다. [email protected]

최산호
instagram.com/g.aenari


글. 정문정

그림. 최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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