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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97 에세이

내가 보지 않았던 세계

2023.04.23

화요일 오후 1시 30분. 초등학교 앞 풍경을 바라보며 든 이런저런 생각들. 내가 속한 세계에서는 어린이를 가까이서 볼 일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서울의 한 카페 안. 마침 회의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카페 2층의 전창 앞에 자리를 잡았다. 평일 오후에만 느낄 수 있는 적당히 느슨하고 평화로운 바이브. 필터 커피가 다 내려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듬성듬성 자리를 채운 사람들을 바라본다. 미간을 살짝 오므린 채 타닥타닥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사람, 북 커버를 씌운, 글만 빼곡한 책에 푹 빠져 독서하는 사람,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연신 배실배실 웃고 있는 사람, 서로에게 몰두하며 대화를 나누는 연인들까지. 각자의 궤도를 자기만의 속도로 돌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경직되어 있던 몸과 마음이 스윽 풀어졌다. 내 안의 전원을 잠깐 끄고 물끄러미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길 건너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몸과 시선을 고정한 채 모여 있었다. 무슨 사고가 난 건가? 아니면 유명한 사람이라도 지나가나?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야트막한 언덕길 위쪽. 이내 모여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분주해지더니 위쪽에서 아장아장 걸어 나오는 아이들이 보였다. 아하, 저 언덕 위가 초등학교였구나. 오후 1시 30분. 초등학생이 하교하는 시간인가 보다. 선생님 인솔하에 반별로 교문을 통과하는 아이들과, 아이돌 스타를 기다리는 팬클럽처럼 고개를 빼고 서 있는 보호자들의 모습이 나에게는 사뭇 낯설었다. 평일에는 매일 펼쳐질 테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 맞다. 나는 평일 오후 초등학교 하굣길을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 양육자도 아니고 이 시간에는 항상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남편과 맞벌이를 하던 친구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의 등하교 때문에 매번 전쟁을 치른다는 말이 생각났다. 둘의 출퇴근 시간이 아이의 등하교 시간과 맞지 않아 매번 돌봄 도우미나 다른 학부형에게 부탁한다는 것. 내 친구는 결국 1년간 휴직을 했고 끝내 복직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어쩐지 당연한 수순이 된 것 같은 이 흐름에 나는 언제나 불편함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당사자도 아니고, 직접적인 피해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 마음은 금세 휘발되곤 했다. 여전히 찜찜한 자국들은 남아 있었지만.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카페 전창의 프레임 때문일까? 한 편의 작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으로 학교 앞 풍경을 관찰했다. 짝을 지어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이열 종대로 내려오는 아이들. 학교 정문에서 도로로 이어진 언덕길은 불과 10m도 채 되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얼굴에는 어쩐지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이제 막 입학한 1학년생들 같았다. 한 달 남짓 겪은 새로운 사회생활이 아직은 어색한지, 아니면 바로 앞에 보호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 긴장한 건지 아이들 대부분 어정쩡한 자세로 두리번거리며 언덕길을 내려왔다. 보호자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두 팔을 벌리며 전속력으로 뛰어가는 아이, 친구들과 인사도 제대로 나누기 전에 도복을 차려입은 사범님에게 송환(?)되는 아이들도 보였다. 같이 갈 친구들이 다 모이면 저 앞에 서 있는 노란색 태권도 학원 봉고차를 타고 가 발차기를 하며 남은 에너지를 쏟겠지. 천방지축 조카 수현이도 그랬다. 여덟 살 무렵 태권도 도장을 다니면서부터 점잖아지더니 명절이나 가족 모임 때 꼿꼿한 자세로 경례를 하며 ‘효도’라는 구호를 외쳤던 녀석. 태도 개선에 하교 돌봄까지 책임져주니 태권도 도장을 비롯한 각종 학원이 보호자들에게는 쏠쏠히 고마운 존재겠다 싶으면서도 만만치 않은 학원비를 감당하려면 또 어떤 것들이 미뤄지고 희생되고 사라질까 생각한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서울 한복판에서는 무엇이 그걸 대체할까. 학원 말고는 쉽게 떠오르는 게 없다.

창밖 풍경에 시선을 뺏긴 지 20분쯤 흘렀을까. 분주한 동선들 사이로 우뚝 멈춰 있는 한 아이가 보였다. 자기 몸집보다 더 커 보이는 책가방을 야무지게 한 번 고쳐 매더니 저벅저벅 혼자 육교로 올라가는 어린이. 어릴 때부터 자립심이 잘 길러진 친구로구만 싶다가도, 혹시 누군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서운한 마음을 품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쓸데없는 걱정도 해본다. 보호자가 오지 않는 아이들도 있을 테니 사람들을 모두가 나오는 정문 말고 별도의 공간에서 기다리게 해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도 들고.

어린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 속에서 자란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일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1타강사가 게스트로 나와 어린 시절 급식 도시락통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배식이 아니라 급식 도시락을 받는 방식이었는데 그녀의 도시락통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파란색이었다. 기초생활수급자 무상급식 도시락통이라는 표식이었다. 친구들은 다 알면서도 ‘왜 너만 도시락통이 하얀색이 아니고 파란색이야?’라고 놀렸다는 이야기. 섬뜩한 지점이다. 사려 깊지 못한 어른들의 무감각한 폭력. 어린이를 고려하지 않은, 어른들의 편의만 생각한 빈틈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균열을 내고 있을까. 좁게는 도시에 가득한 노키즈존 가게들부터 넓게는 어린이를 온전한 주체로 대하지 않는 사회 인식까지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이러한 태도와 인식은 사회 안에서의 약자를 대하는 태도와 정확히 닿아 있기에 문제적이다.

불현듯 이 어린이들이 다 어떻게 자라고 있는 건지, 시스템에 기댈 수 없는 이 사회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부분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며 희생하고 있을지 얼룩덜룩한 기분이 들었다. 2022년 우리나라 출생률(1년 동안 한 국가나 사회에서 인구 1,000명당 새로 태어난 아이의 수)이 0.78%라는 신문 기사, 서울은 그마저도 더 낮은 0.58%라는데. 세수가 적어져서 나중에 노년층을 부양할 여러 토대가 사라진다는 논조들은 중간중간 중요한 이야기는 쏙 빼먹고 하는 위협 같다. 출생률이 낮은 원인을 ‘가임기 여성’의 문제로 돌리는 전근대적인 관점의 기사들도 여전히 양산되고 말이다. 양육자는 아니지만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내가 가져야 할 태도와 인식에 관해서도 다시금 곱씹게 된다.

오후 2시. 복작복작 붐비던 사람들이 어느새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던 학교 앞 일상 풍경. 물론 그 안에는 내가 헤아릴 수 없는 무수히 많은 맥락과 이야기가 얽혀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간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또 다른 세계를 살짝 엿본 것에 불과하다. 얼마 전 인상 깊게 읽었던 <어린이라는 세계>(김소영 지음, 사계절 펴냄, 2020)의 한 구절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오후. 이제 미팅 준비를 해야겠다.

“하지만 어린이는 사회 바깥에서 다 자란 다음 사회에 배치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어린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 속에서 자란다.”


글 | 사진. 김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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