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나도 내 인생이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1)'에서 이어집니다.

ⓒ 일러스터 최산호
누구나 차고 있는 소변 주머니 하나
책마다 반드시 들어가 있는 사람들의 소변 주머니를 확인하면서 저는 그 어떤 이의 눈부심도 곧이곧대로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잘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그 성취 뒤에 얼마나 많은 좌절과 고생을 했을까 싶고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그 때문에 가졌을 기회가 물론 있겠지만 한편으로 겪어야 할 오해와 외로움이 그려지는 듯합니다.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여우의 신포도처럼 들릴 수도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정신 승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에세이를 숱하게 읽어내려가며 까마득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한 발 잘못 디디는 순간 낭떠러지로 떨어질지도 모를 낭떠러지를 안고 산다는 걸 끝내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딱히 다른 누구와도 제 인생을 바꾸고 싶지 않은 거예요.
제가 진행하는 에세이 워크숍에서 ‘국민엄마’로 불리는 배우 김혜자 씨의 인터뷰 영상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김혜자 씨는 자기 인생에 대해 말할 때 이런 정보를 주로 전면에 내세웁니다. “아버지가 재무부 장관이셔서 마당의 대지만 해도 900평인 곳에서 자랐고, 남편은 자상한 사람이어서 배우 생활을 이해해주었기에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광고 모델로도 왕성히 활동했고 극 중에서 맡게 되는 역할이 주인공이 아니면 대부분 거절한다.”는 것이죠. 이 내용만 보면 세상에 이리 좋은 팔자가 있을 수도 있나 싶습니다. 인터뷰 영상에 달린 댓글을 보면 ‘복 많은 사람’이라는 평가가 자주 쓰여 있습니다. 영상을 본 뒤 감상을 나누면 “저런 여유가 있기에 고령에도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다”,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아서 공감이 되지 않는다.”는 평이 주를 이룹니다.
인터뷰 영상을 보여준 다음에 저는 한 여성의 에세이를 이어서 읽어줍니다. 이 여성에게는 위로 언니 두 명이 있고 남동생 하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 온 아들을 데리고 들어옵니다. 온 집안이 수군수군하며 뒤집힙니다. 전까지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던 남동생은 그 충격으로 정신착란 증세에 빠집니다. 그 여성 또한 그 일을 계기로 가슴에 커다란 비밀과 부끄러움이 자라납니다. 우울 증세가 커져 약국을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한편, 방황하던 동생은 마음을 추슬러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도 하는가 싶었는데,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 “연극은 끝났다”라는 말을 남기고 한강에서 투신해버립니다. 에세이에는 모래가 잔뜩 묻은 동생의 시체를 울며 닦던 그 날의 묘사가 아프게 그려져 있습니다. 젊은 날 이름을 날렸던 아버지는 손대는 것마다 실패하면서 철거를 앞둔 여섯 평짜리 판잣집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지요.
김혜자 씨가 2022년 출간한 <생에 감사해>(수오서재 펴냄)에 수록된 일화인데, 이 내용이 담긴 에세이를 읽어준 뒤 바로 앞에서 인터뷰 영상을 보았던 배우 김혜자 씨와 동일 인물이라고 말하면 다들 화들짝 놀랍니다. 에세이를 읽고 나니 이 배우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냐고 물어보면 워크숍 참가자들은 급격히 톤을 바꾸어 말합니다. “어쩐지 눈이 참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또한 에세이 워크숍 두 번째 시간쯤 되면 저는 학생들에게 최근 한 달간 가장 많이 한 생각을 적어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대부분 외로움, 불안함, 답답함, 우울함 같은 감정들을 적습니다. 그다음 다른 사람들이 써 온 걸 봐요. 함께 앉아 있는 이들도 대부분 자기와 비슷한 감정을 써 온 걸 보면 깜짝 놀라면서 다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죠.
저는 바로 이 격차가 여러분이 에세이를 계속 읽고 써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빠짐없이 소변 주머니가 달려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되면, 이 두려움이 나에게만 유일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그러면 조금 더 솔직해도 되겠다는 용기가 생겨나고, 그런 자신을 대면하다 보면 타인을 덜 부러워하게 되며 자기혐오의 밤이 줄어든다고 말이죠. 매일 꺼내 보던 소변 주머니를 일주일에 한 번 들여다보게 되고, 한 달에 한 번, 1년에 한 번 의식하게 되는 식으로 주기가 길어지기도 하고요. 어느 순간에는 나의 성가신 짐 덩어리도 나름 감당할 만해 보일 때가 온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꽤 가까운 시일 내 언젠가는 말이죠.
소개
정문정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더 좋은 곳으로 가자>를 썼습니다. 유튜브 채널 <정문정답>을 진행합니다. [email protected]
최산호
instagram.com/g.aenari
글. 정문정 | 그림. 최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