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성난 사람들> 스틸
“숯불이냐 가스냐, 결정이 쉽지 않네요.” 벌써 숯불 화로를 세 번째 반품하려는 자신을 비아냥대듯 쳐다보는 대형 마트 직원을 향해 부연 설명을 덧붙이는 한 남자는, 지금 죽을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중이다. 그가 반품의 필수 조건인 영수증을 빠뜨렸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평화로운 어느 오후 화로 위에 고기를 구워 먹는 장면으로 전환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 마트에서 빠져나와 귀가하려던 그가 그사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파국의 첫 단추를 끼워버리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성난 사람들>은 대니 조(스티븐 연)가 마트 주차장에서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온 차주를 쫓아가는 2분 50초간의 로드 레이지(Road Rage) 시퀀스로 시작된다.
대니를 포함해 <성난 사람들>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분노 게이지를 낮추기 위한 정신 건강 관리법이 필요해 보인다. 이 드라마는 명상부터 감사 일기 쓰기까지 개개인이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도록 보조하는 산업군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동시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이 드라마의 시작점이 된 로드 레이지는 미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현재진행형 문제 중 하나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미국에서 총 136명이 도로 난동 사건으로 총에 맞아 다치거나 살해당했다.
보복의 설계자
주인공 대니에게 미국은 결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곳이 처음부터 절망의 땅으로 느껴졌던 건 아니다. 한국계 미국인 대니는 마당, 화장실, 창고까지 집의 곳곳을 수리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도급업자다. 할리우드 스타와 부유층이 밀집되어 있는 베벌리힐스에서 한인 다수가 터를 잡고 있는 오렌지 카운티로 조금씩 활동 반경을 이동해왔던 그는 조금만 더 성실하게 일하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삶이 주어질 거란 작은 기대를 품고 있다. 그런 그가 로드 레이지 상대인 중국계 미국인 에이미(앨리 웡)로부터 당하는 최초의 보복은 수리 업체 웹사이트의 별점 테러다. 그간 고객들에게 쌓아온 신뢰를 상징하는 평균 별점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 장면에서 대니는 배달 기사, 대리 운전기사, 가사 서비스 매니저 등 스크린 바깥의 세계를 살아가는 플랫폼 노동자의 울분을 대변한다.
그때부터 대니는 몇 차례의 사적 복수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지체 없이 실행에 옮기지만, 자비 없는 악인이 되지는 못한다. 에이미의 남편 조지에게 새로운 동네 친구가 되기 위해 접근한 그는 조지로부터 “넌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복수를 그만두려 한다. 그런가 하면 대니는 자신이 출석하는 한인 교회의 찬양 팀 리더 에드윈(저스틴 민)을 자신의 구여친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은근히 질투하는데, 정작 부부 사이가 소원해졌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에드윈을 외면하지 않고 등을 토닥여준다. 경찰에게 포위된 급박한 상황에서 자신의 하나뿐인 동생 폴(영 마지노)이 탈출을 도우려 할 때는 모른 척 그의 손을 잡는 대신 자신이 얼마나 자격 없는 형인지를 고백한다. 제대로 보복하는 것이 새로운 삶의 목표가 된 순간에도, 매 순간 인간 대 인간으로서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을 고려할 줄 안다는 점에서 일견 대니는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름다운 분노 속으로
대니의 초인적인 힘은 언제나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가 제 속에서 위태롭게 찰랑거리는 긍정의 기운을 길어 올릴 때 발휘된다. 도급업자가 고장 난 배관을 고치기 위해 집을 허물고 처음부터 다시 세우지 않듯, 대니 역시 자신을 좀먹고 있는 사고방식 전체를 손보기보다는 현재 상황에서 어떻게든 좋은 부분을 찾아낸다. 내키지 않았지만 사촌 형 아이작(데이빗 조)을 따라간 호텔 카지노에서 밤새 돈을 잃은 후, 다음 날 아침 그가 하는 일은 양손 가득 플레이트에 새우와 랍스터를 탑처럼 쌓아 올리는 것이다. “간밤에 잘 안 풀렸지만 뭐라도 좀 먹어야지.”라며 풀 죽어 있는 사촌 형을 고양시킨다. 한밤중에 갓길에서 굴러떨어져 조난된 대니가 “종종 잊게 되는데 LA도 꽤 아름다워.”라고 말하는 걸 보면, 지금이 과연 대도시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타이밍인가 싶다. 분명한 건, 끊임없는 불평과 불만이 그를 끝내 집어삼키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앤디 필드는 그의 저서 <만남들>(팔로우 펴냄)에서 “지금도 그렇지만 도시는 항상 차이의 도가니였다.”라고 말한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사람과 우연히 스친 낯선 사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 타인에 대한 나의 배려를 적절한 보상으로 돌려받지 못할 때, 우리의 속은 분노를 동력 삼아 타오른다. 성난 인간들의 분노를 대체 에너지로 변환하는 법이 개발된다면 적어도 인류의 미래 먹거리 걱정은 사라질 텐데. 총 10부작인 <성난 사람들>에서 과학자가 아닌 평범한 소시민 대니는 1화부터 10화까지 꼼꼼하게 화를 내고, 동시에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한 엔딩을 향해 나아간다. 그와 뜨겁게 끓어오르는 시간을 함께 통과해야 할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소개
서해인
대중문화 뉴스레터 <콘텐츠 로그>를 보내고, 도서 팟캐스트 <두둠칫 스테이션>을 진행한다.
글. 서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