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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27 컬쳐

사소하게 연연하는 - 소녀는 밝혀내고, 상처받고, 성장한다〈핍의 살인 사건 안내서〉

2024.09.05

〈핍의 살인 사건 안내서〉 스틸 (©넷플릭스)

글. 박현주

오래전 마을에서 사라지고 죽었다는 의혹을 받는 아름다운 금발 소녀가 있다. 그리고 소녀의 남자 친구가 범인으로 의심받는다. 드라마 〈콜드 케이스〉의 단골 소재 같은 이런 사건을 다룬 추리 서사는 이제는 그렇게까지 흥미롭지 않다. 첫 번째 이유, 어떤 작품을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 반드시 질투가 섞이기 마련인 사건의 동기나 범인의 정체가 뻔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이런 서사를 더욱 아련하게 만드는 청춘의 안타까운 서정이 한 소녀의 죽음을 소재로 빚어진다는 점이 불공정하게 여겨진다. 추리소설이 흥미롭기 위해선 왜 하필이면 아름다운 소녀가 죽어야 할까? 거기에 깔린 여성에 대한 전형적 인식과 미에 대한 찰나적 감각에 위화감을 느낀다. 라파엘 전파의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린 〈오필리아〉처럼 죽은 소녀를 아름답게 그리는 신비화에는 늘 불온한 기운이 떠돈다.

〈핍의 살인 사건 안내서〉 스틸 (©넷플릭스)

넷플릭스의 〈핍의 살인 사건 안내서〉(전체 6부작)는 위에 말한 진부한 요소를 모두 갖췄다. 금발 소녀의 죽음, 남자 친구의 의혹, 질투와 시기, 치정. 그리고 추악한 이면. 그런데도 이 작품은 꽤 흥미롭다. 요소의 합이 전체는 아니라는 좋은 예이다.

거대한 숲이 있는 영국의 조용한 마을 리틀 킬튼, 17세의 피파 피츠 아모비(엠마 마이어스), 친구들 사이에선 핍이라고 불리는 소녀는 학교 프로젝트 논문의 주제로 5년 전에 일어난 앤디 벨(인디아 릴리 데이비스)의 사건을 조사하기로 한다. 학교에서 인기 많았던 소녀인 앤디는 5년 전 마을에서 사라졌다. 앤디의 남자 친구인 샐(라훌 파트니)은 용의자로 의심받다가 숲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핍은 5년 전의 사건 당일, 학교 복도에서 앤디의 모습을 목격했던 기억을 남몰래 간직하고 있다. 핍과 눈이 마주친 앤디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침묵을 부탁했다. 뒤이어 나타난 샐이 핍에게 앤디가 어디로 가는지 묻자, 핍은 망설이다가 샐의 진지한 눈빛을 믿고 앤디가 간 곳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5년, 핍은 죄책감에 시달려왔다. 자기가 그날 샐에게 앤디의 행방을 알려줬기 때문에 두 사람이 죽은 것일까? 어린아이들에게도 친절했던 샐이 정말 범인일까? 소년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핍은 사건에 뛰어든다. 샐의 동생인 라비(제인 이크발)는 가족의 상처를 파헤치는 핍의 프로젝트를 처음에는 탐탁지 않아 하지만, 결국 핍의 순수한 열정을 신뢰하고 협력한다.

경찰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한 소녀가 해결한다는 스토리는 판타지적이지만, 모든 청소년물에는 10대니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감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어른들이 무능력하거나 무관심해서 버려둔 어린 세대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다는 자신감이 영어덜트 문학의 정신이다. 〈핍의 살인 사건 안내서〉도 유사하다. 핍은 케임브리지를 지망할 정도로 똑똑한 모범생이지만, 사건을 해결하는 건 핍의 지성이 아니라 온갖 귀찮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끈기와 위험을 불사하는 용기이다. 핍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 앤디의 주변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건 물론, 앤디의 행적을 찾아 호텔에 몰래 침입하고 마약 딜러를 찾아 동굴 속 위험한 파티에 침투한다. 미지의 범인이 협박 쪽지와 문자를 보내도 핍의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자기 수사 때문에 가까운 이들이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현실에 맞부딪쳤을 때야 핍은 좌절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못한다. 은폐는 더 큰 희생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핍의 살인 사건 안내서〉 스틸 (©넷플릭스)

무사한 성장이란 없다

〈핍의 살인 사건 안내서〉는 미스터리로서도 견고한 편이다. 사건의 면모가 잔혹하지 않지만, 스릴과 긴장감이 흘러넘친다. 의심스러운 용의자들이 있고, 몇 번의 반전이 있다. 수사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슬픈 희생이 있고, 거기에 주저앉지 않는 탐정의 투지가 있다. 그리고 범인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인물이지만 그에겐 의외의 사정이 있다. 이런 범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용서할 수는 없기에 서글픈 감상이 우러난다.

10대 탐정이 등장하는 많은 수사물의 핵심은 사건 수사의 정교한 절차가 아니라, 탐정의 동기를 깊이 있게 그려내는 것이다. 그 동기는 친구나 가족을 위한 우정일 수도 있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깨끗한 정의감일 수도 있으며, 미스터리에 대한 순수한 지적 호기심이 되기도 한다. 〈핍의 살인 사건 안내서〉의 경우에는 이 모든 동기에 더해 핍 본인의 죄책감이 더해진다. 열두 살의 핍은 샐에게 무어라고 대답해야 했을까? 핍의 사건 수사는 자신의 무죄를 밝히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다. 샐이 범인이 아니라면 핍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혹은 샐이 범인이라면 앤디에 대한 속죄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이 잘못했다면, 앤디에 관한 진실을 밝히고 평안한 잠에 들게 해야 한다. 살인 사건 수사는 본질적으로 죽은 자를 위한 위로이고, 무고한 자를 위한 복권의 성격을 띤다. 희생자들에게 사회가 용서를 비는 과정이다.

이 드라마의 가능성은 이처럼 10대의 요동치는 감정을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았다는 데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웬즈데이〉에서 이니드 역을 맡으면서 국내 시청자들에게도 눈도장을 찍은 엠마 마이어스는 연약해 보이는 외모 속 굳건한 마음을 지닌 핍을 섬세하게 연기해냈다. 이 사건에는 아이를 학대하는 어른들이 있고 그들이 저지른 범죄도 있지만, 서로 상처 주는 10대 관계에 대한 성찰이 있다. 아이는 어른들에 의해 상처를 받았지만 그로 인해 다른 아이에게 해를 끼치고 만다. 자신의 상처를 남에게 돌리지 않고 스스로 일어서는 아이만이 어른의 세계에 진입한다. 무사한 성장이란 없다. 성장은 상처가 없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를 안고 가는 법을 배우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또한 나 자신이 원치 않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사과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 드라마에 그려지는 푸르른 숲의 배경은 일상적이면서도 아름답다. 숲속에는 안타까운 죽음도 묻혀 있고 비밀도 감추어져 있다. 그렇지만 숲에는 새롭게 자라는 로맨스의 싹도 있고, 푸르른 희망도 있다. 나무가 자라서 무성한 숲을 이루듯이, 아이들의 삶도 그렇게 푸르게 무성해진다.

홀리 잭슨의 원작 소설은 현재까지 세 권 출간되었다. 드라마 〈핍의 살인 사건 안내서〉가 속편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핍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모험담. 그를 함께 보고 싶다.


박현주

작가, 드라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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