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반짝이는 야광 스티커를 천장에 붙였어요. 별, 달, 행성 모양까지 종류가 다양했죠. 방의 불을 끄고 그 스티커를 보는 게 왜 그렇게 좋았는지, 어린 마음에 어두운 방 안에서 그 빛을 보면서 위안을 얻었어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스티커가 빛을 잃어가는 것처럼 언젠가부터는 야광 스티커를 보는 일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됐죠. 독립을 하고 건물의 맨 꼭대기 층에 살았던 때, 자기 전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 천장이 없으면 별을 볼 수 있는데, 이제는 스티커가 아닌 진짜 우주를 보고 싶었나 봐요. 그리고 실제로 집에서 하늘을 볼 수 있는 집으로 친구가 이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둥근 천장과 하늘이 보이는 유리 천창 있는 집에서 룸메이트인 고양이 두 마리, 강아지 한 마리, 그리고 여자 친구와 살고 있는 지혜인데요. 오늘은 남산 자락의 터널 위에 있는 그녀의 집에 가보았습니다.
글. 정규환 | 사진. 이규연
귀여운 동물 친구들이 함께 반겨주네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반려동물이 있는 집에는 처음 왔어요. 그것도 셋이나요. 반려동물 소개를 먼저 해줄래요?
첫째 ‘스토기’는 여자 친구가 10년 전에 뉴욕의 한 유기동물 보호소에서 입양한 고양이에요. 언니가 한국에 들어올 때 같이 데려왔어요. 열여덟 살로 추정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 뇌출혈이 와서 안타깝게도 지금은 시한부 판정을 받고 침실 한편에서 요양 중이지만, 수의사 선생님도 믿지 못하는 놀라운 속도로 회복하는 중이에요. 네 발로 당당히 걷고 아프기 전과 같은 양의 밥을 먹는답니다. 검은 고양이 둘째 ‘뽀리’는 여덟 살 정도 됐어요. 원래는 항상 숨어 있는 고양이였어요. 집이나 가족 같은 안정감이 생기고부터 사람이 오면 반기고, 애교도 부리고 성격이 많이 변했어요. 그리고 이 집의 막내인 ‘라거’는 2019년생으로 이제 다섯 살이에요. 경남 마산의 유기견 보호소 출신 믹스견인데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소심하고 겁 많은 강아지랍니다.
셋의 관계는 어떤가요?
스토기가 아프기 전에는 뽀리와 둘이서 아기 고양이들처럼 엄청 잘 뛰어놀았어요. 라거는 그 사이에 끼려고 노력하지만 보시다시피 뚝딱거리는 편이죠. 뽀리가 원래 잘 안 우는 고양이였는데, 스토기가 아픈 뒤로 이후로 한동안 새벽마다 울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 스토기의 건강이 조금씩 회복되고 난 뒤부터는 또 안 울어요.
건강이 나아진 걸 아는 걸까요. 반려동물을 세 마리나 키우는 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아픈 동물을 보살피는 보호자로서도 복합적인 감정이 들 것 같아요.
고양이 여러 마리를 키우다가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한 친구가 해준 말이 있어요. 반려동물과 이별하고 제일 힘든 게 뭐냐고 물어봤을 때 남겨진 아이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는 게 안타까웠다는 거예요. 그 친구의 조언은 언젠가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 죽은 모습을 함께 살았던 동물들에게 보여주래요. 그러면 동물들도 친구가 죽었다는 걸 알고, 처음엔 힘들어하겠지만 천천히 받아들인대요. 보통 반려동물이 죽으면 바로 병원에 가서 장례를 치르니까 인사할 겨를이 없잖아요. 오랜 시간 함께 지냈을 친구 반려동물들에게 애도 기간을 주는 게 맞죠. 언젠가 스토기가 죽으면 뽀리와 라거에게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저도 열일곱 살인 반려견을 키우고 있는데 공감돼요. 그나저나 오늘 집에 흔쾌히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용산구는 보통 어디서든 남산타워가 보여서 그런지 이 동네만의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그중에서 이태원 근처에 살게 된 이유가 궁금해요.
어렸을 때부터 왜인지 모르겠는데 서울에 올라오면 무조건 이태원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5년 전에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고, 그 당시에 경리단길에 살고 있던 언니를 만나게 됐어요. 처음 그 집에 가봤는데, 날것의 집이었어요. 언니가 뉴욕에 살다 와서 서울의 주거 시스템에 적응을 못 했던 것 같아요. 월세가 저렴했지만, 집의 상태가 좋지 않았거든요. 그러거나 말거나 저희는 마치 하늘이 내려준 운명처럼 첫 만남부터 뜨거웠고, 매일같이 함께 지내기 시작했어요. 같이 사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 보광동에 집을 구해 동거를 시작하게 됐어요.
3층의 현관에서 저 멀리 한강이 보이던 그 보광동 집도 참 매력적이었거든요. 이번 집은 가장 큰 매력이 무엇인가요?
제가 집의 재밌는 구조와 개방감에 매력을 느껴요. 사람들이 신축 아파트나 빌라를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생활이 편리하기 때문이잖아요. 음식물 쓰레기나 재활용품 분리배출할 때도 편하고 살기에 쾌적하지만, 중요한 건 재미가 없어요. 이 집은 구조가 독특하잖아요. 남산타워가 한눈에 보이는 옥상도 있어요. 그리고 또 반려동물들이 햇빛을 워낙 좋아해서 채광이 좋은 것도 만족스러웠어요.
누가 뭐래도 하늘이 올려다보이는 돔 형태의 유리 천장이 인상적이에요. 거실에서도 탁 트인 서울의 풍경이 너무 시원해요. 이 집의 가장 큰 장점은 뭐라고 생각해요?
살아보니까 못난 구석까지 ‘그래, 봐줄 만하네.’ 싶어지는 게 이 집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느껴요. 자세히 보면 못난 구석이 많아요. 회색 현관문도 제 눈에는 예쁘지 않고 민트 색깔의 타일도 솔직히 마음에 안 들거든요. 그런데 그것보다 좋은 게 많으니까, 한번에 완벽하게 고치려고 하면 힘들잖아요. 못난 부분을 조금씩 바꾸는 재미를 느끼고 있어요. 이전에는 항상 한번에 모든 걸 다 하려고 했었거든요. 친구가 그런 제 모습을 보더니 ‘집에 완성은 없어.’라고 딱 한 마디 던져주는 거예요. 살면서 조금씩 바꿔가야겠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인테리어 할 때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개성 있는 두 사람의 취향은 잘 맞았나요?
저희는 소품이나 가구를 선택하는 취향에 교집합이 별로 없어요. 저는 편안함과 실용성을 중요시하는데, 언니는 실용성보다는 멋있는 걸 더 선호하는 편이에요. 유일하게 공통적으로 동양적인 앤티크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그런 분위기를 집 안 곳곳에 섞으니까 인테리어가 재밌어지더라고요.
이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가구나 소품을 꼽자면 뭐가 있을까요?
예전부터 원형 등나무 테이블과 의자 세트를 갖고 싶었어요. 모던한 테이블을 쓰는 것보다 고풍스럽더라고요. 영화에 등장하는 힙스터들이 쓰는 테이블 같달까요. 비슷한 의미로 거실장도 마음에 들어요. 비싼 해외 빈티지가 아닌 ‘라이크노아’라는 국내 브랜드예요. 내부를 깔끔하게 비우고 장식장처럼 사용하는 게 좋을지 고민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냥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을 보관했는데도 너무 멋지더라고요. 안 보이게 숨겨뒀을 땐 그저 짐처럼 느껴졌던 것들이 거실장에 들어가니 각각의 오브제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어요.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았네요.
네, 원래 제자리가 없던 애들이 예쁘게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걸 보면서 뿌듯함을 느꼈어요. 물건도 다 각자 제자리가 있다는 걸 알았죠. 그런 의미에서 침실 창문에 걸려 있는 나무발도 좋아해요. 아침에 해가 안방으로 먼저 들어오는데 해가 움직이면서 빛의 방향이 바뀌어요. 나무발 사이로 들어온 빛이 침대 위로 떨어지는 것, 그런 사소한 것들을 보는 게 참 좋아요.
무대에서 춤을 추는 화려한 모습만 보다가 반려동물도 돌보고, 인테리어를 하는 일상적인 모습이 새로운 매력으로 느껴지는데요. 댄서에게 집은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감각하고 있을까 그런 게 궁금하더라고요.
댄서라는 직업이 도파민이 폭발하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집은 가장 편해야 되는 것 같아요. 아이러니하게도 혼자 살았으면 지금처럼 집이 편안하지 않았을 거예요. 같이 사는 사람이 있기에 이렇게 예쁜 집에 편안하게 머물 수 있어요. 지금처럼 살 수 있다는 것도 저에겐 큰 행운이에요. 밖에서 일을 하고 들어왔을 때 ‘우리 집’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 공연을 하고 춤을 추는 그 순간도 물론 재밌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아요.
같이 사는 사람, 그리고 반려동물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집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보여요. 같이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염세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같이 산다는 건 많은 걸 포기하는 일 같아요. 그리고 혼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면서 한편으론 많이 성장한 것 같아요. 언니랑 같이 살면서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살아가는지 배웠거든요. 같이 산다는 건 내가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고, 내가 무언가 보기 싫은 만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럴 수 있다는 걸 이해하는 일이고, 포기와 이해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게 같이 사는 재미 같아요. 이제는 다 떠나서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해요.
지혜와 춤
#볼룸
지혜는 ‘볼룸(Ballroom)’ 신에서 주로 활동하는 댄서다. 볼룸은 1970년대에 뉴욕의 할렘가에서 탄생한 문화로, 라틴, 아프리카계 미국인 LGBTQ+ 사람들이 만들어낸 문화다. 당시 집에서 쫓겨나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끼리 모여서 커뮤니티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우스’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고, 그 사람들이 모여서 어울리고, 놀고, 춤추는 문화가 ‘볼룸’이 됐다. “안전한 공간에서 자기 모습으로 존재하고, 서로 경쟁도 하면서 ‘볼룸’이 만들어진 거예요.” 볼룸의 파티인 ‘볼’ 안에서 춤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보깅’이다. 그런 보깅 댄서 지혜를 계속 춤추게 하는 원동력은 바로 ‘재미’다. “제가 의외로 취미가 없어요. 그런데 춤은 재밌어요. 어렸을 때부터 계속 지금까지 춤을 추고 있는 걸 보면 이 재미가 계속 가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보깅
춤으로서 ‘보깅’은 점점 더 알려지고 있다. 아이돌 그룹 르세라핌의 최신곡 ‘Crazy’의 음악과 뮤직비디오 역시 보깅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 잡지 〈보그〉에 등장하는 모델처럼 부자연스럽지만 우아하게 팔을 쓰거나, 쭈그려 앉아서 걷거나, 플로어에 완전히 눕는 동작이 대표적이다. 보깅이라는 장르를 단지 춤으로 이해하기엔 조금 더 복잡하다. 특히 볼룸에서 여럿이 보깅을 추는 모습을 ‘댄스 경연’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댄스 경연이 아니다. “저희는 춤을 출 때, 런웨이를 걸으면서 ‘서빙’ 한다고 얘기를 하거든요. 이 문화가 탄생한 배경인 소수자들의 당당한 태도, 저항 정신, 패션 등을 많이 보여주고 싶어요.” 우리나라에도 볼룸 신이 있긴 하지만 서구에 비하면 아직 빈약한 편이다. 퀴어 문화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는 볼룸 문화를 알리는 동시에 볼룸의 본질에 집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볼을 열고, 춤을 추고, 춤을 가르치고 있다.
☼ 댄서 노지혜 a.k.a. Roh Telfar. @rohjihye1
정규환
에디터. 도시생활자를 위한 팟캐스트 〈개인사정〉을 진행하며, 웹진 & 프로젝트 〈kyuhwan.kr〉을 운영 중이다.
이규연
바쁜 일상 속 반짝이는 찰나를 담는 사진작가. 편안하고 차분한 사진을 좋아하고, 시선이 오랫동안 머무르는 사진을 찍고 싶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