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을 줄 모르는 프로야구의 열기로 유난히 뜨거웠던 올여름. 역대급 폭염도 야구장을 찾는 팬들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고, 한국 프로야구는 사상 첫 천만 관중 시대를 열었다. 연일 계속되는 매진 행렬에 그 무엇도 야구 흥행 열기를 잠재우지 못할 것 같았건만,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자 올해도 어김없이 야구팬들을 괴롭게 하는 비시즌이 찾아왔다. 야구를 대신할 수 있는 건 야구밖에 없다고 말하는 야구팬들은 어떻게 비시즌을 보내고 있을까. 매일 공룡 탈을 쓴 채 야구장에 출몰하는 NC 다이노스 찐팬 ‘공룡좌’, 1회부터 9회까지 응원단 못지않은 칼각을 유지하며 응원을 선보이는 kt wiz 찐팬 ‘텐션가이’. ‘야없날’(야구가 없는 날)인 월요일을 제외한 주6일을 야구장에서 보내는 열혈 야구팬들에게 비시즌을 보내는 방법을 물었다.
글. 김윤지 | 사진. 김화경
독자분들께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공룡좌 안녕하세요. NC 다이노스(이하 NC)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공룡 그 자체가 되어버린 NC 팬 ‘공룡좌’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불러주시다 보니 어느덧 그게 제 이름이 됐네요.
텐션가이 안녕하세요. kt wiz(이하 kt)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응원하는 kt 팬, ‘텐션가이’ 김대겸입니다. 흰 장갑을 끼고 응원하다 보니 ‘흰장갑좌’라고도 불려요.
지난 10월 1일, 선수와 팬 모두 144경기를 완주하며 프로야구 정규 시즌이 막을 내렸어요. 이제 막 비시즌이 시작된 요즘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나요?
공룡좌 비시즌에도 내도록 야구 생각만 하고 있는 건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웃음) 최근에는 일본에서 열린 NC 퓨처스팀(2군)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교류전을 보러 후쿠오카에 다녀왔어요. (인터뷰일인 10월 16일 기준) 아직 가을야구 중인 팀들도 있고, 올해는 특히 야구의 인기가 뜨거워서인지 관련 콘텐츠들이 끊이질 않아서 시즌이 끝난 것 같지가 않네요.
텐션가이 kt도 얼마 전까지 준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러서 아직은 시즌이 끝났다는 게 실감이 안 나요.(웃음) 이번 시즌 정말 후회 없이 응원했고, 다음 시즌도 후회 없이 응원하기 위해 지금은 잠시 일상으로 돌아온 참입니다. 퇴근 후에 작년에 태어난 딸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게 요즘 제 일상이에요.
시즌 중일 때의 일상도 궁금한데, 평일, 주말 구분 없이 거의 매일 야구장을 찾다 보니 다른 팬분들로부터 건물주나 재벌 2세가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텐션가이 퇴근을 야구장으로 한다는 것만 빼면 평범한 직장인입니다.(웃음) 보통 퇴근하면 4시 반쯤 되는데,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야구장으로 향해요. 그래도 시간이 빠듯하거든요. 평일에는 퇴근 시간이 있다 보니 수도권과 대전 경기밖에 못 가고, 주말 경기는 웬만하면 다 가려고 해요. 시즌 중에는 야없날인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이 똑같아요.
공룡좌 제 본업은 근무 일정이 불규칙한 편이거든요. 평일에 쉬고 주말에 근무하는 경우도 있어서 평일에도 홈, 원정 할 거 없이 야구장에 많이 다녀요. 야구 직관에 최적화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셈이죠.(웃음) 꼭 보고 싶은 경기가 있으면 연차를 써서라도 일정을 맞추고요.
올해 직관률은 어느 정도예요?
공룡좌 아무래도 홈구장인 창원NC파크(이하 엔팍) 경기를 제일 많이 보러 가는데, 지금 사는 곳에서 엔팍까지의 거리가 딱 220㎞예요. 두 시간 반 정도를 운전해서 도착하면 경기 시작 전부터 진이 다 빠지죠. (정말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군요.) 그런가요?(웃음) 이걸 4년 가까이 하다 보니 이제는 별 생각이 안 들어요. 직관률은 매년 커리어 하이를 갱신 중인데, 올해는 어림잡아 90경기 정도 직관한 것 같아요.
텐션가이 세어보니 작년에는 123경기, 올해는 104경기를 직관했더라고요. 분명 처음에는 많이
가도 50경기 정도였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요.(웃음)
‘프로 직관러’가 말하는 가장 직관하기 좋은 구장은 어딘지도 궁금한데요.
공룡좌 이번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홈구장인 PayPay돔에 직관을 다녀와서 엔팍이 얼마나 야구 보기 좋은 구장인지를 다시 한번 느꼈어요. 적어도 지금까지 제가 가본 야구장 중에서는 엔팍이 최고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예요. 최신식 메이저리그급 구장에 에스컬레이터도 있고, 어디서 보든 시야도 좋고요.
텐션가이 아무래도 저는 kt위즈파크가 가장 익숙하지만,(웃음) 개인적으로 아이와 직관하기 좋은 구장은 엔팍, 전광판 보기가 가장 편한 건 SSG 랜더스필드인 것 같네요.
추천하고픈 구장 내 맛집이 있다면요?
공룡좌 사실 직관 중에는 공룡 탈 때문에 먹기가 힘들어서 잘 안 먹게 되는데요.(웃음) 제일 기억에 남는 건 SSG 랜더스필드의 크림새우?
텐션가이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맛집은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의 농심가락이에요. 매년 비시즌만 되면 그곳의 떡볶이와 열무냉면이 아른거려요.
올해는 프로야구의 역대급 흥행으로 티켓을 구하기도 힘들 정도였는데, 경기장 안팎으로 늘어난 야구의 인기를 체감한 순간이 있나요?
텐션가이 야구에 관심이 없던 지인들도 저한테 야구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하더라고요. “네가 좋아하는 팀이 kt야?”라든가 “삐끼삐끼춤(KIA 타이거즈 투수가 상대 팀 타자를 삼진 아웃시켰을 때 나오는 짧은 음악에 맞춰 치어리더들이 추는 춤. 치어리더가 자리에 앉아서 화장을 고치다 음악이 나오자 일어나 무심한 표정으로 춤을 추는 모습이 담긴 쇼츠 영상이 SNS상에서 인기를 끌었다.)은 다른 팀들도 다 추는 거야?”라든가.
공룡좌 작년에는 홈 경기가 매진되면 자축의 의미로 초코파이에 매진 기념 스티커를 붙여서 경기장을 찾은 팬분들께 나눠주기도 했었어요. 그 정도로 엔팍이 매진되는 건 드문 일인데, 올해는 12번이나 매진이 됐더라고요. 평일, 주말 할 거 없이 팬들로 가득 찬 경기장을 자주 볼 수 있어서 행복한 시즌이었어요. 작년 NC의 가을야구를 보고 유입된 팬들이 많은데 올해 성적이 좋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요.
말씀하신 것처럼 신규 야구팬의 유입도 눈에 띄게 늘었어요.
텐션가이 저는 여기에 숏폼의 영향도 분명 있을 거라 봐요. 기존에는 저작권 문제 때문에 경기 영상으로 ‘움짤’이나 숏폼 등을 제작해서 SNS에 업로드하는 게 제한됐었거든요. 근데 올해 티빙이 프로야구 중계권을 확보하면서 숏폼 등의 2차 저작물을 부분적으로 허용했어요. 제한이 완화되면서 야구 경기 중 일어난 재밌는 상황들을 담은 다양한 쇼츠 영상이 SNS나 커뮤니티에 퍼졌고, 야구팬이 아닌 사람들도 야구 콘텐츠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죠. 아까 말한 삐끼삐끼춤도 그렇고, 공룡좌가 경기 중에 탈 사이로 음식을 먹는 모습이 담긴 쇼츠 영상도 높은 조회 수를 기록했거든요.(웃음)
공룡좌 예능이나 OTT의 영향도 분명 있지 않을까요? 주변을 보면 〈최강야구〉로 야구에 입문하신 분들도 많더라고요. 유튜브에도 야구를 다루는 콘텐츠가 확실히 많아졌고요. 아, 치열한 순위 싸움의 영향도 있을 거라고 봐요.
kt와 NC도 프로야구의 인기에 힘입어 한 시즌 최다 관중 신기록을 달성했어요. 구단의 창단 때부터 함께한 두 분에게는 이 기록이 남다르게 다가올 것도 같은데, 어쩌다 지금의 팀을 응원하게 된 거예요?
텐션가이 야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메이저〉라는 애니메이션 때문이었어요. 야구가 하고 싶어서 혼자 연습하다가 사회인야구단까지 했었죠. 대학에 가서는 우연한 기회로 액션 치어리딩을 배우면서 응원의 매력을 알게 됐고요. (역시 칼각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네요.) 전문적으로 배운 건 아니지만 재미를 붙여서 응원단장까지 했었죠. 그렇게 사회인야구단도 하고 응원단장 활동도 열심히 하다가 군대에 갔는데, 전역하고 왔더니 마침 제가 사는 곳에 야구단이 생긴다고 하는 거예요. 개막전을 보러 갔다가 kt의 야구에 푹 빠졌죠. 야구도 보고 내가 좋아하는 응원도 마음껏 할 수 있다니!
공룡좌 저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대한민국 대표팀이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따는 모습에 반해서 야구에 빠지게 된 일명 ‘베이징뉴비’예요. (그때는 NC가 창단하기 전인데, 그전부터 야구장에 자주 다녔어요?) 고향인 창원에 야구장이 생기기 전까지는 1년에 한두 번 가는 게 다였어요. 엘리트 선수 출신은 아니지만 실제로 10년 가까이 야구를 했거든요. 부상으로 관두긴 했지만, 야구를 보는 것보다는 직접 플레이하는 걸 더 좋아했어요. NC 창단 직후에 2군 경기를 보러 다니긴 했는데, 지금처럼 열혈팬은 아니었어요. 찐팬이 된 건 NC가 1군에 진입한 첫해인 2013년이었는데, 제가 당시에 해외에서 근무 중이었거든요. 외국 생활이 너무 힘들었어요. 하루는 그냥 다 포기하고 귀국해야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생각으로 퇴근해서 야구를 보려고 TV를 틀었는데 NC 응원가 ‘마산스트리트’ 가사가 유독 귀에 꽂히는 거예요. “정든 그곳을 등지고서 난 떠나왔네. 꿈을 가득 안고서.”라는 가사가 너무 제 얘기 같아서 펑펑 울었죠. 이제 막 1군에 진입한 선수들이 초반의 부진을 딛고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도 받았고요. 나도 이대로 도망쳐서는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후로 정말 열심히 살았고, 당당하게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죠. 한국에 돌아와서는 정말 열심히 NC 경기를 보러 다녔어요. 제가 힘들 때 NC가 옆에 있어줬듯, NC가 힘들 땐 제가 옆에 있어줘야겠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당시의 저는 NC 덕에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어요.
그럼 처음부터 공룡 탈을 쓴 건 아니군요?
공룡좌 2018년이었나. 우연히 다른 팀 팬분이 동물 탈을 쓰고 응원하는 걸 보게 됐어요. 재밌어 보이더라고요. 나도 공룡 탈을 쓰고 야구장에 가면 ‘인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덜컥 공룡 탈을 구매했죠.(웃음)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떨려서 처음에는 그냥 한번 하고 말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시는 거예요. 고생한다며 응원도 해주시고. 재미가 붙어서 계속 야구장을 찾다 보니 중계 카메라에도 잡히고 시구도 하고 공룡좌라는 이름까지 붙었네요. NC가 언제든 엔팍의 응원석을 팬들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인기 구단이 되면 공룡좌도 자연스레 기억 속으로 사라질 거라고 얘기하곤 하는데요. 이제 슬슬 공룡 탈을 벗을 때가 오고 있지 않나 싶어요. 올해만 12번의 매진을 기록했고, 이제 원정 경기를 보러 가도 확실히 NC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커진 걸 느끼거든요. 탈을 벗기 전까지 더 열심히 응원해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공룡 탈을 벗어도 응원은 계속되겠지만요.
응원단이 파견되지 않는 원정 경기에서는 응원단장 역할을 하는 텐션가이지만, 그런 텐션가이도 처음에는 혼자 큰 소리로 응원하기가 망설여졌다고요.
텐션가이 원정 경기를 보러 가면 응원을 유도하는 팬분들이 계신데, kt가 창단한 지 얼마 안 됐을 당시에는 응원가나 안무를 모르는 팬분들이 많다 보니 누구 한 명 선뜻 나서지를 못했어요. 처음엔 저도 비슷했는데 응원가랑 안무를 익히고 나서부터는 ‘나라도 나서볼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만 해도 누군가 먼저 목소리를 내주길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생각으로 조금씩 소리 내 응원하기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다른 팬분들도 제 리듬에 따라 응원 구호를 외쳐주시더라고요. 처음엔 조금 부끄러울 수 있는데, 누구 한 명이 먼저 목소리를 내주기만 하면 금방 다 함께 응원하는 분위기가 돼요.
야구장에서 응원하며 겪은 일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공룡좌 올해 9월쯤 있었던 일인데 제 자리 바로 근처로 파울볼이 날아왔어요. 근처에 있던 여성분이 파울볼을 주워서 어린이들한테 줬는데 어린이들이 “이거 공룡좌 주자!”라고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더니 저한테 와서 공을 건네더라고요. 당연히 거절했죠. 아저씨는 집에 공 많다고요. 근데 애들도 쉽게 안 물러나더라고요.(웃음) 계속 거절하기도 미안해서 그걸 받고 아이들과 포옹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사실 공룡 탈을 쓰기 전부터 사인볼 같은 게 생기면 야구장을 찾은 어린이 팬들한테 주곤 했거든요. 아이들이 커서도 야구장에 자주 찾아와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요. 그런데 반대로 아이들한테 파울볼을 선물로 받다니 저로선 배로 감동이었죠.
응원 팀이 언제나 좋은 성적을 거둘 수는 없는 법. 팀이 부진해도 야구장을 찾게 만드는 야구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텐션가이 다른 스포츠들은 경기의 승패를 확 뒤집는 게 힘들거든요. 그런데 야구는 그게 가능해요. 만루홈런 한 방이면 3점 차 경기도 얼마든 뒤집을 수 있는 게 야구니까요.
공룡좌 올해 NC가 11연패를 끊었던 경기가 생각나네요. 매일 언제까지 연패하나 두고 보자는 생각으로 경기장을 찾았었죠.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가 있던 그날도 거의 오기로 야구장을 찾았는데 그 경기에서 그간 타격이 부진했던 김형준 선수가 3연타석 홈런을 터뜨리며 연패를 끊었어요. 아, 그때의 감동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죠.(웃음) 흔히들 야구를 도파민의 스포츠라고 하는데, 정말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거든요. 그걸 맛보고 나면 야구를 끊을 수가 없어요.
올해 비시즌을 처음 맞이한 야구 입문자들에게 비시즌을 견디는 방법을 알려주신다면요?
공룡좌 비록 경기는 없지만, 찾아보면 의외로 비시즌에도 할 게 많아요. 당장 11월에 WBSC 프리미어 12(국제 야구대회)가 개최되고, 스토브리그(야구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을 위해 구단을 재정비하는 기간. 이 기간엔 주로 다음 시즌 경기력 강화를 위한 선수들의 재계약-FA, 트레이드 등 팀 재구성이 이뤄진다.)엔 FA나 선수 영입 소식을 좇느라 바쁘죠. 구단 유튜브에도 재밌는 콘텐츠가 많고요. 올해는 프로야구가 흥한 만큼 비시즌에도 즐길 만한 콘텐츠가 더 많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