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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30 스페셜

올해의 나만의 ○○○ (2)

2024.12.03


김소리


글 | 사진. 김소리

책 만들고 만화 그리는 그래픽 노동자. @boricoribooks

세례식 중 평화를 간구하며 안수를 받는 모습, 성산동 성당에서.

1. 올해의 변심 - 돌아온 탕아 마틸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2〉(2024)를 보니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아를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가 몇 있는 것 같다. 내게는 그중 하나가 바로 천주교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손을 잡고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리고, 노래를 부르고, 바라는 바가 있을 때면 하느님을 찾으며 두 손을 합장하고 기도를 했다. 그러던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커다란 재앙이 우리나라에 일어났다.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뒤집혀 생때같은 목숨들이 스러져간 것이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만약 신이 있다면 이렇게나 많은 목숨들이 안타깝게 사라지도록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리라. 신은 인간을 만들었고, 내가 아는 한 그는 당신의 창조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후로 천주교에 대한 나의 냉담은 10년이 넘게 지속되었고 이와 비슷한 일–신의 존재를 의심케 할 정도로 믿을 수 없이 인류애가 사라지는 일–을 마주할 때마다 만난 적도 없는 신에 대한 미움은 커져갔다.

그렇게 신과 인간을 미워하며 얼굴 구기고 살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2003)를 보게 되었다. 그 영화 속 신은 인간들이 기도로서 간구하는 바를 메일로 받아보며 인간 세상 대소사를 관망하기도, 개입하기도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사실 나는 인간을 미워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사랑하고 싶은데 내 마음이 좁아서, 사는 게 팍팍해서, 신이 인간을 외면해서 혹은 기타 등등의 이유로 그 마음과 떨어져 지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저런 고민 끝에 나는 다시 성당에 나가게 되었다. 인간을 사랑하고자, 미워하는 세상을 더 큰 마음으로 껴안고자 신 앞으로 다시 나아갔다. 그렇게 올해 7월 순전히 나의 의지가 담긴 도전 끝에 나는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나는 마틸다라는 세례명을 얻고 신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고양이를 돌보는 기간 중 생긴 에피소드를 〈육묘일기〉라는 만화로 연재했다. 사진은 깜찍한 방해꾼 마론이.

2. 올해의 도전 - 고양이와 함께 보낸 명절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명절이 싫었다. 그 이유는 기억을 거슬러 사춘기 무렵으로 돌아가면 알 수 있다. 매번 키도 커지고 얼굴도 수려해지는 나의 남동생과는 달리 나는 자꾸만 살이 찌고 여드름이 나고 성질머리도 괴팍해져간 탓에 친척들의 지적과 놀림을 받기 일쑤였다. 그뿐 아니라 동생은 사촌들과 나가 자전거 타고 TV에서 틀어주는 명절 특선 예능을 볼 동안 나는 앞머리 떡져가며 전을 부쳐야 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온갖 핑계를 대며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전한 나만의 명절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에 대한 배덕감과 짜릿한 자유를 느끼며… 그러던 중 파주에 살고 있는 친한 친구가 추석 연휴 동안 장기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며 키우고 있는 고양이 마론이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자유가 가득한 파주에서 명절을 혼자 보내게 되었다.

이것은 내게 커다란 도전이기도 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비인간 동물과 살아본 적 없는 나는 조금 두렵기도, 설레기도 했다. 친구가 만들어놓고 간 매뉴얼을 보며 고양이의 밥을 챙기고 화장실을 치우고 놀이 시간을 제공하고 심기가 불편해진 그를 달래며 나는 난생처음으로 비인간 동물과 우정을 쌓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다. 집이 좁아서,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서, 작별이 두려워서, 이런저런 마음의 문제로 미뤄왔던 비인간 동물과 함께 사는 삶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내년의 나는 누구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아직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내게도 밥과 잠과 돌봄을 염려할 짝꿍이 생겼으면 좋겠다. 인간도 좋고, 인간이 아니어도 좋다.

교통사고로 발을 다쳤을 때 찍은 엑스레이

3. 올해의 미신 - 아홉수와 날삼재

아홉수란 9, 19, 29, 39와 같이 끝자리에 9가 들어가는 숫자를 일컫는 말로, 한국에는 예로부터 아홉수에 해당하는 나이는 불길하다고 여기는 미신이 있다. 나는 올해 만으로 스물아홉 살, 즉 아홉수였다. 올해를 시작하면서부터 제발 아홉수가 무탈하게 지나가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집 안의 걸레도 깨끗하게 빨아 내다 버리고, 2023년 12월 31일 자정에서 2024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에 현관문도 활짝 열어 좋은 기운을 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마침 집도 새롭게 이사를 한 터라 명주실에 묶은 북어도 현관문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들이 무색하게도 올해는 정말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두 번의 소개팅에 실패하고 교통사고를 당해 발을 다치는 바람에 회사도 가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도 무산이 되었고…(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지만 2024년을 한 국자 남겨둔 지금 올 한 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다.

사랑을 쟁취하는 데엔 실패했지만 그때마다 나의 쓰린 마음을 달래주러 한걸음에 와준 친구들이 있었고, 병석에 드러누운 나를 위해 동생이 목숨처럼 아끼던 ‘플스’ 4를 내게 빌려주었고, 비록 애정을 갖고 있던 프로젝트는 다른 이의 손으로 넘어갔지만 그 덕에 경주마처럼 달리기만 하던 내가 잠시 쉼을 갖고 새로운 프로젝트에서 더 크게 활약할 수 있었다. 아홉수의 끝에는 날삼재가 있다. 삼재라 불리는 재앙이 빠져나간다는 뜻으로 이 시기에는 운이 따르고 길한 일이 일어날 확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비록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올해 나와 같이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낸 이들 모두 내년에는 더 큰 운을 맞이하길 손 모아 기원하며 이 글을 쓴다.

4. 올해의 애틋함 - 사랑을 응원하는 만화

가끔 지나간 쪽팔린 사랑 때문에 잠도 오지 않는 밤이 있다. 이 만화는 그런 밤에 그려졌다. ‘그때 그렇게 행동했더라면(혹은 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나은 결과가 있었을까 반추하게 되고 그때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나 바보 같고 후회돼서 애꿎은 가슴만 치고 전하지 못한 말이 맺혀 가슴이 곰팡이가 슬’고 난리 부르스를 치는 소란스러운 밤이었다. 그 위대하고 존엄하다는, 영원불멸의 진리를 탐구하는 수학자, 과학자, 철학자들도 사랑은 귀하고 특별한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나는 당최 그 말의 뜻을 모르겠고. 그냥 나에게 사랑은 산울림의 노랫말처럼 너무 쓰고. 나를 매일 밤 쪽팔림에 잠 못 들게 만들고. 그럼 나쁜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사랑을 말할 언어가 있고 서로를 껴안을 두 팔이 있고 그걸 기꺼이 내어줄 넉넉한 마음까지 있다. 사랑은 귀한 것. 사랑은 특별한 것. 신이 인간을 이 세상에 내었을 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했다는데. 그를 닮은 우리는 서로 사랑을 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위해 오늘도 묵주를 붙들고 기도한다. 징그럽고 사랑스럽고 애틋한 인간들을 위해서.


고아라


글 | 사진. 고아라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때가 가장 짜릿!하고 행복합니다.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랑과 용기를 얻어 추진력을 얻기 위함입니다.

유튜브 채널 〈난아라요〉에서 배우일지를 기록 중이다

1. 올해의 문장 - 사과를 미리 깎지 마세요

“사과를 미리 깎지 마세요.” 내 머리를 띵하게 만든 한 줄의 문장이다. 오디션과 촬영 현장에서의 배우들을 위한 책 〈굿 캐스팅〉(한권의책, 2014)에 실린 어느 선배 배우의 조언이다. 사과를 미리 깎으면 갈변하듯이 혼자 대사에 대한 감정을 미리 만들어서 현장에 오지 말라는 것이다. 상대가 없이 혼자 만든 감정은 생생함이 떨어진다. 신선하지 않은 연기는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연기하는 배우 입장에서도 재미가 없달까.

동료 배우들과의 워크숍을 하면서 사과를 미리 깎지 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더욱 깨닫는 요즘이다. 때로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게 순간에 진심인 대사들을 뱉고는 한다. 상상된 상황이지만, 감정은 진짜! 늘 그렇게 연기하고 싶다. 아삭 새콤한 맛이 나는 사과 같은 연기, 그런 배우.

소설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를 읽다가

2. 올해의 짝사랑 - 알고 싶은 마음

참 웃기지만 한동안 뒤늦게 MBTI에 빠져 지냈다. 그 이유는 내게 궁금한 어떤 사람이 생겼기 때문인데, 그에 대한 아주 작은 힌트는 MBTI뿐이라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떠올리며 그 작은 힌트를 지도 삼아 혼자 상상 속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나와 비슷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주 다른 유형의 사람, 관계를 발전시키기엔 다소 어려운 타입일 거라며 겁을 주는 탓에 그의 MBTI 특징을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왠지 모르게 힘이 빠졌다가도 괜스레 스멀스멀 이상한 승부욕 같은 것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그 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예습해둔 그의 MBTI 공략 방식대로 다가가려고 나름의 노력을 했다. 그러나 어느새 풀어져 내 마음 가는 대로 솔직한 시간들을 보냈다.

그러나 여기서 나의 허점이 드러나고 마는데… 그의 MBTI는 알았어도 연인의 존재는 몰랐던 나는 크게 김이 새고 말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웃음이 났다. 조금은 허탈했고 조금은 웃겼다. 결국 중요한 건 MBTI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당시 빌렸던 소설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는 어느새 연체되었다며 도서관에서 내게 경고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고 몇 번의 경고가 쌓인 오늘에서야 나는 그 책을 놓아주었다. 반납 전에 부랴부랴 페이지를 넘기며 읽어 내려가던 나의 시선이 멈춘 문장은 “그래도 나는 MBTI가 좋아. 누군가를 알고 싶은 마음이라니 기특하고 귀엽잖아.” 기특하고 귀여운 나는 네가 알고 싶었어. 아마 너는 꿈에도 모르겠지!

선둥이 아라(왼쪽)와 후둥이 애라의 어느 생일

3. 올해의 질투 - 질투는 나의 사랑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건 이런 느낌일까. 곧 결혼을 앞둔 동생을 보며 매일 조금씩 새롭게 깨달으며 어림짐작을 해본다. 한날한시에 태어났지만 우리는 얼굴과 이름은 닮았어도 서로 다른 성향과 개성을 가진 만큼, 다른 기회와 선택들로 인해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도 조금은 비슷하다고 여겼는데 올해 초 동생의 결혼 소식을 듣자 어디론가 곧 날아가버릴 것처럼 마음 한편이 휑했다. 나만의 귀여운 파랑새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올해의 마지막 토요일 누군가의 작고 어여쁜 피앙세가 될 예정이다.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축복하고 애정하는 두 사람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늘 함께였던 동생이 조금씩 누군가를 사랑하고 애틋해하는 걸 지켜보며 묘한 질투가 피어올랐다. 데이트가 늦어지면 괜한 간섭을 하기도 하고, 결혼 소식에 남몰래 베갯잇을 적시기도 했다. 엄마의 태에서부터 함께였던 내 반쪽 애라가 이제는 누군가의 반쪽이 된다는 게 영 어색하고 서운했다. 그런 나의 서툰 질투를 멈출 수 있었던 건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라 언니, 애라를 데려가는 게 아니라 가족이 한 명 더 생겼다고 생각하세요.”라며 사람 좋게 웃는 얼굴 덕에 나의 부끄러운 질투는 종말을 맞았다. 늘 함께 케이크에 초를 켜고 나눠 불던 내 동생 애라는 나에게 케이크 위의 체리를 양보하는 동생이었다. 오빠는 그런 애라에게 체리뿐 아니라 케이크를 전부 내어줄 것 같은 사람이라 둘의 사랑을 제일 가까이에서 응원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첫 여름 짧은 소설집 〈길을 걷다가 넘어지면 사랑〉

4. 올해의 데뷔 - 〈길을 걷다가 넘어지면 사랑〉

어릴 적 마음이 답답할 때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질 때면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책장 가득 빼곡히 꽂힌 소설들은 나에게 새로운 여행 티켓처럼 느껴졌다. 마음에 드는 제목의 책을 꺼내 펼치면 언제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그 무한한 세계들은 나의 유일한 출구이자 여행이었다. 그런 내가 올해 여름 짧은 소설집을 내게 되었다. 잔뜩 기울어진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기어코 넘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넘어질 용기로 사랑을 하기를 바라며 쿵! “길을 걷다가 넘어지면 사랑, 마음이 한쪽으로 쏠리거든요.”

이 글은 "올해의 나만의 ○○○ (3)"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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