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은
글 | 사진. 정성은
입신양명을 위해 스탠드업 코미디 하는 에세이 작가. 쓴 책으로는 대화 산문집 〈궁금한 건 당신〉(2023, 안온북스)이 있고, 〈치부노트〉 내년 출간 예정이다.
1. 올해의 도전 - 돈 받고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다
총선을 앞둔 어느 날, 지인인 마케터에게서 DM이 왔다. 뉴웨이즈라는 젊은 정치인을 양성하는 에이전시에서 총선 관련 행사를 하는데, 오프닝에 10분 정도 스탠드업 코미디를 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미국에 사는 코미디 동료에게 연락해 ‘어떡하지? 할까 말까?’ 물었다. 윌리엄은 네가 하고 싶냐고, 아니면 활발히 활동하는 다른 여성 코미디언, 이를테면 원소윤을 추천하는 건 어떻겠냐고 했다. 전문 스탠드업 코미디언은 일주일에 몇 번씩 비슷한 세트로 연습하고 새로운 무대에 가도 그걸 써먹곤 하는데, 나는 너무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가슴이 꽉 막혔다. 하고는 싶은데 못 하겠는 느낌. 하지만 이 정도면… 스탠드업 코미디를 안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매일 농담 쓰는 단톡방에 혼잣말을 올렸다.
“코미디언분들께 궁금한 게 있어요. 여러분은 혹시 누가 돈 주고 스탠드업 코미디 와서 해달라 하면 바로 ‘네!’ 하고 기쁜가요? 저는 그때부터 심장에 압박이 오면서 마비가 될 거 같아요… 무슨 얘길 해도 안 웃길 것 같아서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요. 그래서 그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요. 저보다 잘하는 사람들을 추천하거나 못 하겠으니 다음에 하겠다는 식으로 넘기죠. 왜 이렇게 담력이 없고, 쫄보고, 기세가 부족할까요? 여자인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무대에 나가면 제 사생활 얘기나 하고… 아무래도 제 무의식에 ‘불쌍한 나’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게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이젠 의식적으로 불쌍한 척 안 하려고요. 그래서 제가 얼마나 잘났나면요.”
참고로 이 방은 대화하는 방이 아니고, 각자 농담을 (혼잣말을) 올리는 방이다. 잘난 점에 대해 쓰려는데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자 김병모라는 코미디언이 답했다.
“사실 저는 당당하게 얘기하고 그다음 날 그 얘기한 걸 후회하며 공황에 시달려요. 제가 공황장애가 있는데 무대에서 공황이 오는 상상만 해도 공황이 옵니다. 근데 실제로 공황이 무대에서 오니까 사람들이 웃더라고요. 그게 제 캐릭터랑 맞았나 봐요. 공황이 치유됐어요.”
그러자 이팥이라는 코미디언이 답했다. “‘여자여서도 무시할 수 없을 거 같아요’에 살짝 반박하고 싶다가,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제 스스로 생각하기에 ‘남자라는 점이 무시할 수 없는 원인인’ 부끄럽기 짝이 없는 행동들이 떠올라서 옷깃을 여미며 뒤돌아섭니다.”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코미디를 하면 슬픈 일을 농담으로 쓸 수 있어서 슬픔을 잘 견딜 수 있게 될 줄 알았는데, 그냥 슬픈 일을 부르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 그렇게 된 것 같다. 내가 선택한 길이니 뭐 할 말은 없지만. 일단 코미디는 하겠다고 했다. 농담방에 솔직하게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져서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혼자 말고 서촌코미디클럽 멤버들이랑 하겠다고 했다. 여기엔 나랑 박재용, 김수지 이렇게 하는데 셋 다 별로 웃기진 않다. 하지만 얘기하면 인사이트가 있다. 흥미로운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이걸 시작으로 기회가 주어지면 일단 다 했다. 영어로 10분, 한국어로 20분, 보수가 없는 것부터 3만 원, 5만 원, 10만 원, 30만 원. 서울의 술집, 제주의 시어터, 부산의 북페어, 광주의 서점까지. 완벽해지면 무대에 서는 게 아니라, 무대에 서면서 배워나가기로 했다.
2. 올해의 우연한 깨달음 - 연예인 생일 축하 광고
팬들이 만든 지하철 배너 광고를 보고 있으면 사랑은 기를 모아주는 행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걸 한자로 하면 ‘합기’려나. 그럼 합기도는 사랑의 운동일까? 궁금해 어원을 찾아보니 ‘합기’란 ‘나와 상대방의 기운을 합쳐 나의 의도대로 상대방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상태’란다. 무섭다. 하지만 언제나 원하는 일. 나의 기세로 상대를 끌어들여 제압하는 것이 합기도의 원리라면, 나보다 고차원적인 기를 소유한 자는 어떻게 컨트롤할 수 있을까. 나의 기운을 최고 상태로 만드는 것이 상대를 컨트롤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기를 축적하고 운기하여 최적의 상태로 가는 구체적 방법은 없어 보인다. 마음의 다스림, 마음을 고요히 한다는 피상적인 방법 외에는.
그러다 어느 무술 블로그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기의 문제는 결국 마음의 문제와 연결된다. 따라서 진정한 합기가 되려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 비움으로써 채울 수 있다.” 상대방의 기와 나의 기를 하나로 하여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 상태를 비움으로써 상대를 나의 품 안에 끌어안으란다. 하지만 주의 사항이 있단다. 상대를 어떻게 하고자 하는 의지 없이,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견지하여야 한다고. “상대방을 제어한다, 상대방을 나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는 의식을 갖는 순간, 합기는 깨진다. 마음의 비움 상태 즉 공의 상태에서 도달하는 것, 우주의 기와 하나 되어 원래의 본연의 상태로 귀의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합기이다.” 열심히 단련해야 하는 무술의 끝도 결국엔 마음을 비우는 것이라 하니, ‘이러면 진짜 이루어지는 거 맞죠?’ 묻고 싶은 마음을 참고 오늘도 마음을 비워본다.
3. 올해의 견문 - 스반홀름
“좋은 세상을 알아버렸다. 그건 바로 여럿이서 같이 밥 먹고 살아가는 삶. 새로운 사람들과 계속 만났다 헤어지는 삶. 서로에 대해 덜 판단하고, 웬만하면 좋은 걸 주려는 삶. 비교하지 않고 경쟁하지 말고 어울렁더울렁 살아가는 게 얼마나 좋은지, 이곳에 와서 알아버렸어.”(2024. 6. 14)
덴마크의 생활공동체 스반홀름에서 두 달 동안 지내며 쓴 일기 중 한 대목이다. 김목인의 노래 ‘스반홀름’을 듣고 떠난 그곳은 1970년대에 설립된 생활공동체로 약 150명의 사람들이 집, 식당, 차량 등을 공유하며 살고 있다. 자신이 번 돈의 80%를 공동체에 내는 공유경제를 실천하는 이곳은 농번기에 필요한 일손을 충당하기 위해 게스트(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숙식을 제공한다. 자본주의 속 각자도생 사회에서 하던 내 집 마련, 야근, 오늘 뭐 먹지? 등의 걱정을 안 해도 되어서 참 마음이 편했고, 몸 쓰는 일을 다소 낮게 생각한 나의 편협함을 깨달은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공동체 생활을 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게 진짜 사랑이라는 걸 배웠다.
4. 올해의 사진
스반홀름에서 찍은 사진인데 팬티를 안 입은 것처럼 나왔다.
조은식
글 | 사진. 조은식
소개말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
1. 올해의 뒷말 - 투덜이 스머프
요즘 엄마는 퇴근길마다 휴대전화를 붙들고 있다. 누구와 그렇게 자주 통화를 하는지 물어보니, 같은 층의 직장 동료다. 근무가 겹치는 날이면, 퇴근길 내내 일터에서 있었던 불평불만을 털어놓는다며, 마치 ‘투덜이 스머프’ 같다고 한다. 올해 내가 들은 뒷말 중에서 가장 귀여웠다. 살다 보면 뒷말이 오갈 때도 있는데, 그것은 비방에 가까워질수록 해악이 되고, 투정에 가까워질수록 귀여워지는 것 같다. 엄마의 투정은 할퀴려는 고양이를 향한 포옹 같은 느낌이었다.
2. 올해의 뷰파인더 -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나는 종종 ‘창문’한다. 내 방에 낸 창문들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창문들은 크기와 위치가 제각각이며,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어서 원할 때마다 조정할 수 있지만 웬만해서는 처음 그대로이다. 일이나 약속이 없으면 방구석에 하루 종일 있는 편인데, 방에 창문이 없을 때에는 조금 답답함을 느꼈던 것도 같다. 몇 년 전, 친구에게 구매한 A3 크기의 풍경 사진을 방에 붙여놓고 한참 들여다보았던 것에서 창문하기가 시작되었다. 카메라의 작은 뷰파인더를 통해 보는 것 같기도, 반면에 방이 조금 넓어진 것 같았다. 이후로 그림, 포스터, 친구들과 함께 찍은 네 컷의 사진 모음, 벽에 붙일 수 있는 것들은 다 붙여왔고, 그것들이 방 안에서도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문이 되어주었다.
최근에 친구의 작업실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는데, 엽서로 제작한 그의 졸업 작품 사진을 받았다. 집에 돌아와 벽에 붙였다. 가보지 못한, 어느 추운 겨울날 열렸던 친구의 전시를 상상하며. 올해 내가 가장 적은 움직임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다.
3. 올해의 선언 - 친구의 결혼식 사회를 보다
사람의 마음은 크기와 방향이 제각각 달라서, 그만큼 만나고 헤어지는 모양은 가늠하기 어렵고, 무엇보다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에 그것이 무엇으로 되어가는지 알 수 없어서 복잡한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절연했던 친구에게 연락이 올지는 모르는 일이고, 우리 사이 영원하자던 학창 시절의 친구들과 점차 연락이 뜸해질지는 모르는 일이다. 인연이라는 희뿌연 안갯속에서, 그래서 나에게는 서로의 역사를 두껍게 알만큼의 오랜 친구가 소중하다. 그 친구는 대학교 같은 과의 한 학년 선배인데, 이렇게 오랜 세월 알고 지낼지 그때는 몰랐다. 당시에 유행하여 품귀현상이 일었던 과일 맛이 나는 소주를 찾으러 다니며 어렵게 구해 마셨고, 학교 축제의 과 주점에서 함께 노래를 불렀고, 수업 땡땡이를 치기 위해 망을 봐주었고, 입대할 때에는 시계와 카드 지갑을 받았고, 친구의 친구들을 만났다.
그랬을 뿐인데 우리의 대화 주제가 과제-연애에서 졸업-연애로, 취업-연애에서 안부-결혼으로 바뀔 만큼 시간이 흘렀다. 결혼식 사회를 봐달라니. 나는 양복조차 입어본 적이 없는데. 과장을 조금 보태어 ‘결혼식 사회 보는 법’ 주제의 영상은 전부 다 보았고, 다이어트는 실패했다. 결혼식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울지 않은 게 다행이다. 나는 성혼을 선언했고, 친구는 외우기 어려운 이름의 나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4. 올해의 퍼즐 조각 - 잃어버리지 않는 것
한 해의 운세를 점치는 방법으로써, 새해 첫날을 어떻게 보냈는지가 그 해를 결정한다. 며칠 전에, 사주와 토정비결에 푹 빠져 있는 동생이 나를 앉혀놓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독창적인 운세법이다. 동생은 올해 첫날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렇게 올 한 해 내내 아르바이트만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새해 첫날을 어떻게 보냈는지 떠올려보았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의 올해는, 공교롭게도, 그렇게 몇 조각을 잃어버린 채로 맞추는 퍼즐처럼 보냈다. 일이 바빴다는 것이 핑계가 될 수 있을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다.
집에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쌓여 있어도 서점을 기웃거리며 나중에서야 읽게 될 책을 사고는 했었는데. 보물을 찾는 심정으로, 해외 OTT까지 뒤져가며,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의 미개봉작들을 밤새도록 몰아보고는 했었는데. 즉흥성에 기대어 굳이 가보지 않았을 길로 돌아 돌아 산책하고는 했었는데. 하트 모양이라면 무엇이든 사진으로 찍어 수집하고는 했었는데. 올해는 그러질 못했다. 친구들의 생일을 뒤늦게서야 깨닫고, 매년 챙겨오던 기념일들을 놓쳤다. 나를 결정하는 조각들을 잃어버리고는 점점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무섭다.
아직 내게 남아 있는 것, 그러니까 나사 빠진 나의 올 한 해를 지탱해줄 수 있었던 퍼즐 조각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빠른 포기를 긍정할 수 있는 낙관성인 것 같다. 잃어버린 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퍼즐은 맞추지 않아도 그만이다. 실제로 나는 퍼즐을 끝까지 맞춰본 적이 없다.
이 글은 "올해의 나만의 ○○○ (4)"에서 이어집니다.